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정설 (문단 편집) === 종교개혁과 예정설 === 아우구스티누스가 정리한 교리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종교개혁]]에서부터였다. 중세 교회는 아우구스티누스 주의에서 은총에는 주목했으나, 선택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16세기 종교개혁 이전부터 스콜라 철학자들 사이에서 기존의 스콜라 철학의 방법론에 반대한 새로운길 노선과 근대 아우구스티누스주의 학자들에 의해 아우구스티누스가 인용되면서 기존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옛길에 대해 지나치게 인간의 자유의지를 긍정했다는 비판이 나왔고 14세기 후기 아우구스티누스 학파들이 이주제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잉글랜드 켄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브래드워딘과 그의 영향을 받은 [[존 위클리프]]와 그를 따르는 롤라드파 무리는 예정설을 강조했다. 그리고 200여년 후 16세기 마르틴 루터가 강조한 '믿음으로부터 의로움을 칭함 받는다'([[이신칭의]]), 또는 의로움을 인정받는다는 노선, 즉 구원에서의 은총의 역할을 가장 강조한 [[로마서]]가 루터를 비롯한 [[개신교]] 신학자들에게 각광받으면서 예정설이 다시 강하게 주목받았다. 또한 더 이상 가톨릭교회에서 강조하는 선한 행위들이 구원과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한 개신교 신학자들은 믿음, 은총과의 관계를 분명하고 명확하게 정리한 예정설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종교개혁의 시발점이었던 [[마르틴 루터]] 입장에서 기존 중세시절 가톨릭의 [[스콜라 철학]] 은총론을 정리하면 대략 이와 같다. > 원죄에도 불구하고 이성과 자유의지는 죄에 물들지 않았고, > 스스로 이성과 자유의지로 인간이 신을 찾으려는 '''행동을 하면 그 보답으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다. > 출처: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 ([[알리스터 맥그래스]]) 루터의 신학은 이를 반박하며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취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보다 더 강경한 아우구스티누스주의를 내세웠다. 스콜라식 구원관은 행위구원론으로 비판받을 것을 의식하여 인간의 노력은 별 가치가 없지만 하나님이 마치 납동전을 금은 재화로 바꿔주듯이 인간의 보잘것 없는 행위를 구원이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큰 보상으로 준다는 예시를 곁들였다. 그러나 이러한 스콜라식 구원론은 앞서 근대 아우구스티누스 학파와 [[오컴의 윌리엄]]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길(via moderna) 학파에게 큰 비판을 받았고, 16세기 마르틴 루터에 이르러 종교개혁당시 면죄부나 성유물 고행 수도행위 성지순례등 교회에서 인정하는 선행이 큰 부작용을 끼쳤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스콜라식 구원론이 교회를 망쳤다고 보았고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은 인간의 행위보다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강조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마르틴 루터의 인간관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 사상에 매우 철저히 입각해 '원죄로 타락한 인간은 완벽하게 타락했기에 선을 실천할 능력은 없으며, 타락 이후에는 강렬한 자기만족 욕구와 자기중심주의 공로만을 추구한다고 논증했다. 루터는 스콜라 철학의 은총론은 아우구스티누스 시기 도나투스파와 펠라기우스 주장인 자격주의,윤리주의, 능력주의, 공로주의로 변질 되었다고 비판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의 같은점이라면 인간에게 자유의지 있으나 [[자유의지]]는 악으로 향할수 밖에 없다는 것이고, 둘의 다른점이라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유의지는 선과 악 중에 악쪽으로 심각하게 기울었다는 것이고 루터는 자유의지는 완전히 악으로 타락하였다인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에게 약간이라도 선한면이 있다고 본점이 다르다. 한때의 루터의 지지자이며 옹호자였던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 당시 개혁진영과 기존 가톨릭교회 양쪽의 비판과 압력에도 중립을 지켰는데 결국 가톨릭 교회의 압박에 의해 루터에 반박하는 글을 쓰며, 남긴 저서는 자신과 루터의 견해와 큰 차이점이었던 <자유의지론> 이었다.[* 자유의지를 긍정적으로 보긴하는데 펠라기우스처럼 인간히 온전히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은 아니나. 자유의지에 긍정적이며 협력설 입장이다.] 루터와의 신학적 차이인 자유의지론에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명제를 딴 제목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죄의)포로가 된 자유의지' 라고 설명했다.] '''노예의지론(De Servo Arbitrio)'''이란 책을 써서 반박했을 정도였다. 루터는 노예의지론에서 후대 루터주의 신학자들과 달리 이중예정설을 견해를 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에 대하여>] 그러나 비슷한 시기 독일농민전쟁이 발발하여 루터는 예정설에 대한 견해를 적극적으로 펴기 어려웠다. 농민들을 이끈[* 사실 현재 독일농민전쟁은 노임보다는 광부계층이 더 많고 기사, 용병, 몰락 귀족들까지 합세한 다양한 구성이었으며 14~16세기 유럽내 동시 다발적으로 비슷한 민란이 잦았다. 영국의 경우 와트타일러의 난이라는 대규모 농민반란이 있었다.] 토마스 뮌처가 산상수훈을 근거로 '''고난 받는 백성이 선택받은 백성이다'''라고[* 뮌처는 자신을 기드온의 검이라 자처했고, 이렇게 선택받은 백성들을 가나안 정복시기 이스라엘 백성으로, 기존 상층민을 타락한 가나안 백성으로 선포하여 죽이는걸 정당화 했다. 또한 가라지와 알곡의 비유를 들어 가라지를 처낼 날카로운 낫을 자처했고 농민들이 지배계급과 지주와 기존 [[가톨릭교회]]와 [[사제(성직자)|사제]], [[수도자]]들을 공격하는데 이용한다.] 설교하여 민란이 독일 남부를 휩쓸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루터는 '''"하나님의 백성은 고난을 받으나, 고난받는 백성이 모두 하나님의 백성은 아니며,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지는 그분만이 아신다"'''라며 농민반란군의 과격한 선민의식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터가 내세운 [[이신칭의]]는 동시대 개신교 신학자 [[필리프 멜란히톤]]과 [[마르틴 부처]]에 영향을 주어 각자 독창적인 칭의론 연구에 영감을 주었고 필연적으로 예정과 소명의 개념을 동반했기 때문에 종교개혁 시작부터 예정설 논란을 내포하고 있었다. 한 세대 후 [[장 칼뱅]]은 선배학자들의 연구를 집대성하고 독자적으로 논리적 신학적으로 정리하여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고, 따라서 구원의 은총은 하나님께서 미리 창세 전부터 구원받을 영혼과 그렇지 못한 영혼을 미리 예정하고 믿는 사람들은 선택된 자들이며, 반대로 믿지 않는(혹은 믿지 '못하는')자들은 유기된 자들이라는 이른바 '''이중예정론(Double-Predestination)'''을 주장하였다.[* 일부에선 칼뱅이 이중예정론을 주장하지 않고, 테오도르 베자 같은 칼뱅의 제자들이 정립했다고 하기도 한다. 칼뱅이 남긴 저작들을 두고 논란이 있는 부분인데 어떤 부분에선 이중예정론을 어떤 부분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단일예정론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또한 다른 일부에선 칼뱅에게 예정론을 말했어도 후대의 칼뱅주의자들과 달리 그렇게 비중있게 다루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가장 강력한 근거는 역시 로마서, 그 중에서도 '[[에사오]]'와 '[[야곱]]'의 비유와 토기장이의 비유를 든다. 즉, 에사오와 야곱 중 이유없이 에사오를 미워하고 야곱을 미워하였으며 토기장이가 그릇을 자신의 마음대로 만들고 그릇은 결코 거기에 반박을 제기할 수 없는 만큼 구원 역시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불린 사람들이며, 나아가서는 이 사람들은 결코 구원을 상실하지 않을 것이라는 개신교 교리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 외에도 요한복음 6:37~44, 에베소서 1:4~6, 테살로니카 전서 2:13, 잠언 16:4 등, 꼭 로마서에만 등장하는 개념은 아니다. 그러나 루터 사후 순수루터주의 신학자[* 멜란히톤 주의자들은 칼뱅식 견해를 일부 받아들였다.]들은 이러한 이중 예정론을 반대했는데 "하나님은 저주를 예정하지 않으셨다"는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