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옌시산 (문단 편집) === [[반장전쟁]] === 하지만 장제스는 북벌이 끝난 이후 [[편견회의]]를 통해 군벌 세력을 감축하려 했고 지방분회를 폐지함으로 군벌의 영향력을 약화하려 했다. 이에 크게 불만을 품은 군벌들은 잇다라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바로 [[반장전쟁]]이다. 옌시산도 평진위수사령관에 임명되어 베이징과 톈진의 지배권을 보장받은 것 때문에 표면상으론 오랫동안 장제스와 국민정부에 복종하는 입장이었으나 국민정부가 베이핑 정치분회 주석에 자기 사람을 임명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평진위수사령 자리에 사의를 비치며 장제스의 베이핑 방문에 맞춰 병가를 내버리는 등 갈등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uploadfile/warofpresident.jpg|width=100%]]}}}|| || 반장전쟁 직전인 1928년, 국민당 회의에서 펑위샹(왼쪽), 장제스(중앙)과 함께 찍은 사진 || 이후 반장정쟁이 발발하자 옌시산의 경우에는 1929년 2월 [[리쭝런]]이 호남성 정부주석 [[루디핑]]을 무단파면한 [[호남 사건]], 1929년 3월 [[바이충시]]의 반란을 포함한 [[1차 장계전쟁]]의 발발, 5월의 [[펑위샹]]의 [[1차 장풍전쟁]]에는 장제스를 옹호하며 중앙의 편에 섰으나 펑위샹이 궁지에 몰리기 시작하자 전제 3집단군 총사령의 자격으로 펑위샹에게 반란을 일으킨 것에 대해 나무라면서도 자신이 하야하여 그의 체포령이 해제되는 것을 도울 터이니 그것이 실현되면 같이 외유하자는 기묘한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이에 펑위샹은 입산독서를 핑계로 옌시산의 본거지인 타이위안으로 피난하였다. 이에 국민정부는 7월 6일 펑위샹 체포령을 철회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옌시산이 중원을 지배하기 위한 계획의 포석이었다. 어쨌거나 이 시점에서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1929년 3월, 국민당 3차 당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Yen_Hsi-shan_TIME_Cover.jpg|width=100%]]}}}|| || [[중원대전]] 당시 [[타임(주간지)|타임지]]에서 중국의 차기 총통으로 소개된 옌시산 || 결국 1929년 9월 [[장파쿠이]]가 반란을 일으키고 1929년 10월 펑위샹이 [[2차 장풍전쟁]]을 일으켰다. 12월에는 [[탕성즈]]가 장파쿠이에게 합류하면서 [[장당전쟁]]이 벌어졌지만 장제스에게 모두 진압되었다. 이 시점까지 사태를 관망하던 옌시산은 1930년 장제스에게 동반하야를 요구하면서 [[중원대전]]을 일으키고 [[펑위샹]], [[리쭝런]], [[바이충시]], [[왕징웨이]] 등과 함께 베이핑 국민정부를 수립하여 중국의 지배자 자리를 꿈꾸었지만 장제스에게 패배하면서 11월에 하야를 통전, 베이핑 국민정부를 해체하고 일본이 지배하는 [[다롄]]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도이하라 겐지]]와 밀약을 맺어 산서로 돌아가 화북을 장악하는 것을 일본이 지원하는 대가로 관동군이 중국 동북부를 점령하는 것을 원조하기로 하였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30년 옌시산과 왕징웨이.jpg|width=100%]]}}}|| || 중원대전 중인 1930년 9월 9일, 베이핑에서 만난 옌시산과 [[왕징웨이]]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