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춘추시대) (문단 편집) == 역사 == 《[[사기(역사책)|사기]]》권30 오태백세가에 의하면 [[고공단보]]의 장남인 태백(太伯)과 차남 중옹이 삼남 계력(季歷: [[주문왕]]의 아버지)에게 제후의 자리를 양보하고 남쪽으로 내려가 세운 국가이다. 태백이 죽고 그에게 자식이 없어 중옹이 뒤를 이었고, 그의 후손들이 대를 이었다고 한다. [[무왕(주)]]은 큰할아버지 태백과 작은할아버지 중옹의 자손을 찾다가 마침내 중옹의 자손인 주장(周章)을 찾아내 그를 오에 정식으로 봉하고 주장의 아우 우중(虞仲)은 [[우나라]](虞)에 봉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본래 주 왕실과 같은 희성의 제후였던 우(虞)의 시조 태백에 가탁한 것으로 실제로는 중원 지역의 거주민과는 이질적인 민족 집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에 오월 지방의 토착민들은 중원 사람들과 풍속이 상이하여 단발 머리[* 소설 열국지에서 오나라를 상대하는 중원 국가의 장군이 '오나라 사람들은 상투가 없다'는 언급을 하는게 나오는 등 중원 사람들에게는 이 풍속이 신기했던듯하다.]를 하고 문신을 했다고 하며, 피부색이 검고 키가 작은 민족이었다고 한다. 이 지역으로 이주한 황하 중류의 화하인과 월인이 융합되는 과정에서 월인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전신인 구오족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국가 명칭이 중원 국가와는 달리 1음절이 아닌 2음절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는 국명이 실제로 2음절이어서라기보다는, [[상고한어|상고 중국어]]에 없는 발음을 이렇게 [[음차]]한 결과일 수도 있다. 실제로 오나라를 가리키는 한자인 吳는 당시의 상고 중국어로는 *ŋʷˤa라고 발음했고, [[오스트로아시아어족]]에 속하는 현대 [[베트남어]]로는 ngô라고 발음한다.]. 다만 [[절강성]]에서 발견된 오나라의 유물에는 오나라 왕의 성씨가 희성 고발씨(姬姓姑發氏)라고 적혀 있어서, 일단은 오나라 왕실이 주나라 왕실과 같은 집안인 것은 맞는 것 같다. [[주나라]] 왕실 입장에서도 웬만큼 확실하지 않고서야 생면부지의 족속을 같은 일족, 그것도 윗대 큰어른의 자손으로 인정할 리가 없다[* 이처럼 비(非) [[한족]]계가 대다수인 나라를 [[한족]] 왕실이 통치한 사례로는 [[전국시대]] 국가인 [[중산국]](中山國)이 있는데, 이민족인 백적(白狄)이 세운 국가이지만, 오나라처럼 군주의 성씨가 희성(姬姓)이다. 그리고 이후에도 이런 사례가 몇번 나오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훨씬 후대인 서기 6,7세기 경에 지금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투르판시|투르판]] 일대에 존속한 [[고창국]](高昌國)이었다. 고창국은 한족 왕이 통치하고 있었지만, 주민들의 절대다수가 [[토하라인]]이었다.] 한 예시로 기원전 482년, 오왕 부차와 진정공이 위나라의 황지에서 회맹하여 패자 자리를 다투었는데 이 때 진정공은 자신이 희성 제후들 중 가장 작위가 높다는 이유로[* 진나라 군주의 작위는 후작이었으며 진문공 시절에는 주나라 천자로부터 구석의 원형이 되는 혜택을 받는 등 같은 제후국들 중에서도 격이 달랐다.], 부차는 자신이 희성 중에서 서열이 높다는 이유[* 오나라의 시조가 고공단보의 장,차남이라면 진나라의 시조는 주무왕의 아들이자 주성왕의 동생인 당숙 우였으며 주무왕의 할아버지가 고공단보의 3남이다.]로 패자임을 주장했다. 제19대 군주 수몽 때부터 중원국과는 달리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처럼 왕호를 사용하였다. 초의 견제 세력을 후방에 두기 위해서 [[진(춘추오패)|진(晉)나라]]에서 여러 인재와 중원에서 쓰이던 전차를 도입했다. 그 결과 기원전 6세기경부터 나라가 크게 흥성하기 시작했고 오왕 [[수몽]] 사후에 오왕 [[제번]] 때에 이르러 수도를 오로 [[천도]]하였으며 [[합려]]와 그의 [[아들]] [[부차]]대에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 시기에 춘추 전국 시대 최강의 강대국 중 하나인 초나라와 나름 대국 중 하나인 [[제(춘추전국시대)|제나라]]를 공격했으며, 특히 초나라는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물론 두 대국 이외에도 추나라, 노나라, 월나라 등 수많은 나라들이 오나라의 패권에 고개를 숙였다.] [[쿠데타]]로 집권한 합려는 선진적인 중원의 문물이나 인적 자원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으며, [[제(춘추전국시대)|제나라]] 사람으로 [[손자병법]]을 지은 [[손무]] 또한 합려에 의해 초빙되어 중용되었다. 합려는 초나라로부터의 망명객인 [[오자서]]를 등용하여 초나라를 멸망 직전으로까지 몰아넣는 등의 활약을 펼쳤으나, 초나라 신하인 [[신포서]]의 간곡한 부탁으로 지원하러 온 [[진(통일왕조)|진(秦)나라]]의 지원군과 국가가 빈 틈을 노린 [[월나라]] 왕 [[윤상(월나라)|윤상]]의 기습 및 동생 부개가 일으킨 봉기에 의해 후퇴해야 했다. 합려는 이를 설욕하기 위해 윤상의 아들 [[구천]]과 전쟁을 벌였으나 전사하였다. 합려의 아들 부차는 선왕의 정책을 계승하여 공격적인 대외 정책을 펼쳤으며, 각고의 노력 끝에 월왕 구천을 물리치고 위에 붙어있던 대국 제를 물리치고 큰 회맹을 열어 패자의 칭호를 받기까지에 이르렀으나, 그 틈을 노린 구천의 공격으로 인해 부차는 자결하고, 오나라는 기원전 473년에 멸망하고 만다. 즉 '''전성기와 멸망 시기가 같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