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리엔탈리즘 (문단 편집) ==== [[일본 제국]]의 오리엔탈리즘 내재화와 민족주의 ==== >"그 대열(아시아)을 벗어나서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함께해야 한다. 중국과 조선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는 이웃 나라라 하여 특별히 배려할 필요 없이 서양인이 이들을 대하는 방식에 따라서 처분해야 할 것이다." >---- >- [[후쿠자와 유키치]], 1885년 시사신보 논설에서. 그의 [[탈아론]]이 드러난 대표적인 문장이다. 19세기 서양 세력의 침투가 가속화됨에 따라 동아시아 각국은 근대화를 추진하였는데, 그중 일본은 가장 성공적인 결과를 얻어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유일하게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한다. 이때 오리엔탈리즘 또한 내재화되어, 서양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본 제국|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체계를 구성하는 요소로 기능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일본은 ‘[[탈아입구|탈아]]’를 통해 인접한 아시아 국가들을 일본 자신과 구별하고, 차별과 멸시의 시각을 가지고 바라보며 지배의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오리엔탈리즘에는 '문명국인 서양과 대비되는 열등한 동양 국가인 일본'과 '열등한 여타 동양 국가와 대비되는 문명국가인 일본'이라는 상반된 인식이 병존하며, 이 때문에 세계 인식과 주체성 획득의 측면에 있어서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 >“근대 일본의 국민적인 체험으로부터 생긴 대외관의 가장 큰 특징은 ‘낡은 모욕적, 양이적인 서양관’의 극복과 더불어 ‘구태의연한 근린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일본을 구별하려는 자의식’이 강화되어 두 가지 대외관이 양극으로 분해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 >- [[강상중]],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이경덕·임성모 역, 이산, 1997년, 91p 이 [[자기모순]]적인 관념이 형성된 이유는 일본의 개항 과정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서양의 경우 고대로부터 형성된 동양과 서양이라는 두 집단을 구분하는 인식이 중간에 파괴되는 일 없이 점차 확장되어 끝내 근대 [[제국주의]] 식민권력과 융합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기에 그들은 동양과의 관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의심의 여지 없이 확고하게 점할 수 있었다. 반면 일본은 [[쿠로후네 사건|강제적인 개항]]이라는 폭력 행위의 피해자 상태에서 근대화를 시작하였기에, 한때 서양을 오랑캐로 여겼던 관념은 파괴된 대신 그들에 대한 열등 의식이 기저에 확고히 자리잡았다. 그 결과 일본의 심상에는 아시아 출신 후발 제국주의 국가로서의 두 가지의 인식이 형성된다. 하나는 '유럽 세력의 동진을 막기 위해'[* 고야스 노부쿠니, 《동아, 대동아, 동아시아》, 이승연 역, 역사비평사, 2005, 27p] 유럽 문명을 내재화하여 이 당시에 입은 정신적인 외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식이며, 다른 하나는 아시아 국가로서 서양 세력의 침탈에 맞서고 주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관념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일본 식민제국의 건설은 경제적인 이유보다는 심리적인 이유로 강박적이리만치 빠르게 진행되었다. 다시 말해, 동양 안에서 여타 아시아 국가들을 열등 국가로 재정립하고 자신을 이에 대비시킴으로써 잃어버린 주체성을 찾고, 서양에 대항해 자국을 중심으로 ‘주권선(내지)’과 ‘이익선(외지)’이 구축된 방사형의 제국 체제를 구축하는 작업이 수행되었다.[* 위의 책, 85p] 때문에 도쿄대 [[강상중]] 교수는 당시의 일본의 제국 건설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자본주의|금융자본주의]] 국가로서의 제국주의 실행자라는 실질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이데올로기 면에서는 이미 훌륭한 [[제국주의]] 국가였다." >---- >- [[강상중]],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95p 한편, 이 과정에서 [[동양]]은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구별을 통해 기존 동아시아 체계의 종주국이었던 [[중국]]이 대표하는 '[[지나]]'라는 열등한 대상, 그리고 문명이자 진보의 주체에 해당되는 '[[일본]]'의 두 가지로 나뉘었다.[* 윤명철, 〈오리엔탈리즘의 정의 및 역사적 전개-한국상황과 관련하여〉, 한국민족학회, 2010, 225p] 그리고 사이드가 주장한 바와 같이 이러한 구별 의식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다양한 서양의 과학적 학문이 동원되어, 일본 문명에의 문화적인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중국 문명에 대한 철저한 부정[* 《동아, 대동아, 동아시아》, 133p] 과 세계 보편사적인 유럽 문명과 일본 문명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방향의 연구가 진행된다. 예를 들어 사학자 다케고시 요사부로(竹越與三郞)의[* 1865~1950. [[게이오대|게이오의숙]] 출신의 사학자. 중의원과 귀족원 의원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경우, 저서 《이천오백년사》에서 [[유럽]] 문명이 해양을 통해 일본에 도달하였고, 그 증거로 일본이 [[가나(문자)|가나]]로 대표되는 자체적인 표음문자를 사용함을 들었다. 그에 따르면 정체적인 중국의 표의문자인 [[한자]]는 단순히 빌린 것일 뿐이다.[* 위의 책, 69p~72p] 그리고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의[* 1862~1933. 일본의 외교관. [[무사도]]를 주창하는 등 소위 '문명국' 일본의 위상 확립에 매진했던 인물이었으나, 그 과정에서 식민지배의 차등적 질서를 옹호하고 제국 식민정책에 실무자로 참가했다.] 경우에도 《[[무사도]]》를 통해 서양에서 종교를 통한 도덕 교육이 이루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 또한 무사도를 통한 도덕 교육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며 일본의 유럽적 특징을 강조하였다.[* “니토베 이나조는 무사도를 쓰게 된 동기를 이렇게 말했다... 즉 ‘종교 없이 어떻게 도덕교육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라고.” 위의 책, 51p] 이러한 이항 대립적 비교 연구는 일본이 1895년과 1910년에 각각 [[대만]]과 [[조선]] 등 '[[지나]]'에 속하는 식민지들을 획득함에 따라 식민지 지배 권력과 융합하여 더욱 심화되었다. 그로 인해 식민지의 지나적인 속성, 그리고 이에 대비되는 일본의 유럽적 속성이 더욱 체계적으로 정리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진행된 통제된 교류를 통해 일본은 자신들의 우월성과 지배의 당위성을 더욱 확고하게 믿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이때부터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체계로서의 오리엔탈리즘 담론이 본격적으로 구성되었다. 대표적인 예시가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와[* 1874~1930. 일본의 경제학자. 뮌헨 대학교 출신으로 일본 경제학의 선구자로 꼽힌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당시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복지국가론까지 주창한 인물이었으나 식민지 조선에 대해서는 인종차별적인 시각을 숨기지 않았다.] [[니토베 이나조]]의 사례이다. 후쿠다 도쿠조의 경우, 그의 저서인 《일본경제사론》과 《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에서 [[막스 베버]]의 사회경제 발전 이론에 따라 [[문명]]과 [[야만]]을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조선은 높은 [[노비]]의 비율로 보아 [[봉건제]] 사회 진입하지도 못하였기에, 정상적인 발전 단계에서 이탈한 '이계'로 정의된다. 반면 일본은 서양의 봉건제에 대응하는 [[사무라이|무사 계급]]의 지배를 받아 근대 국민국가의 자본주의 체제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자체적으로 마련한 '정계'라고 주장하였다. >"고도의 문화로 갑작스레 군림해서 그 역사적 발전을 무시하고 그 국민적 성격을 양해하지 못하는 외국 문화(서양)여서는 안 된다. 한국인을 노동자로 계발하고 유도해서 완전한 인격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한국의 토지를 개척하고 경작해서 서서히 자본화하고 그 가치를 높이는 기술을 이해하고 있는 자여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에 수많은 경제적 설비를 베풀고, 수천년의 교류에서 얻은 양해와 동정을 통해 한국인을 부리는 데 익숙하며, 한국의 토지를 사실상 자기 사유로 삼아 서서히 농업경영을 시도하고, 그 생산품인 쌀, 콩의 최대 고객인 우리 일본인이야말로 이 사명을 수행하는 데 가장 적합한 자가 아닌가. (......)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서는 그 부패와 쇠망의 극을 달리고 있는 ‘민족적 특성’을 밑바닥부터 소멸시킴으로써 우리에게 그들을 동화시켜야 할 자연적 운명과 의무를 지닌 ‘유력하고 우세한 문화’라는 무거운 사명을 다해야 할 자가 아닌가." >---- >- 후쿠다 도쿠조, “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 1902년 그리고 샤토브리앙이 오리엔트에 대해 보였던 사례와 같이, 후쿠다의 조선 연구에는 조선 여행에서 받았던 경험에서 기인한 '전근대적이고 더럽고 나태한 조선인'이라는 개인적 편견이 짙게 깔려 있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인들의 나태한 모습에서 발전에 대한 욕망이 낮다는 결론을 도출하였고, 때문에 그들이 여전히 고대 [[노예제]] 사회에 안주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오리엔탈리즘 담론 내의 통제된 교류를 통해 형성된 그의 관념은 최종적으로 [[백인의 의무|일본이 조선을 이끌어]] 이러한 [[식민지 근대화론|열등한 속성을 개량해야 한다]]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진다.[*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99p~103p]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