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자서 (문단 편집) === 황혼 === 당초의 목표인 초나라를 완벽하게 복속시키는 것은 실패했다. 그러나 사실상 초나라 군대를 괴멸시켰고 이를 통해 오나라는 중원 진출도 넘볼 수 있는 강대국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줬다. 이에 따라 오왕 합려의 자신감도 자연스럽게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이런 자신감도 얼마 가지 못했다. 오나라와 초나라 양국이 싸우는 동안 묵묵히 성장하던 월(越)나라를 계속 눈여겨본 합려가 오자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군을 일으켜 월을 정벌코자 친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월의 책략가 [[범려]]의 계략에 넘어가 대패하고 본인도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오나라로 돌아오지도 못한채 사망했다. 합려에겐 적자가 없기 때문에 자연스레 후계 문제가 불거졌고 오의 실세나 다름없던 오자서가 합려의 차남[* 부차가 차남이 맞는지는 역사서마다 이야기가 다르다. 장손이라거나 장남이라고 서술한 책도 꽤 있기 때문. 하지만 장손이라는 주장은 부차와 합려의 생몰을 추정해 봤을 때 믿기 어렵다. 오히려 오강과 태자가 결혼한 뒤, '''운우지락을 알지 못하는 나이에 태자비가 요절'''하고 태자가 오강을 그리워하다 그 뒤를 따랐다는 이야기로 봤을 때, 부차가 차남일 가능성이 제일 높다.]인 [[부차]]를 지지함으로서 그대로 부차가 왕위를 물려받는다. 부차는 재임한 직후부터 아버지의 원한을 갚겠다며 국력을 키워 월에게 복수하고자 했고 오자서도 같은 복수귀 동지끼리 통한게 있는지 이번에는 부차의 친정을 막지 않고 오히려 자신까지 따라갔다. 만반의 준비를 한데다가 방심도 하지 않는 오나라 군대는 지난번의 승리로 오만해진 월왕 구천의 군대를 가볍게 깨부수고 압승했으나 범려의 모략으로 구천이 부차 앞에 무릎을 꿇어가며 사정사정했고 결국 부차는 월나라의 강화 요청을 받아들였다. 강화의 결과로 월왕 구천은 오나라에 포로로 잡혀왔지만, 온갖 아첨과 뇌물을 총동원하여[* 이때 부차의 똥맛을 보면서(!) 건강을 살펴주었고 중국 4대 미녀로 꼽히는 유명한 미녀, [[서시]]를 바쳤다.] 오왕 부차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여 끝내는 월나라로 귀환, 오나라에 대해 복수의 칼을 갈게 되었다.[* 여기서 구천이 패배의 굴욕을 되새기고자 곰 쓸개를 핥았다는 일화와 부차가 원한을 잊지 않고자 땔나무 위에서 잠을 잤다는 일화와 묶어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 한다.] 오와 월의 전쟁이 종전된 뒤 당연히도 오자서는 월에게 집중적으로 노려지게 된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월나라를 뿌리뽑아야 한다며 강경히 주장하던 이 노신(老臣)을 남겨두다가 혹시나 부차가 오자서의 말에 혹해버리면 그대로 월나라가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월의 범려와 대부 문종은 당시 조정에서 오자서 못지 않은 지위를 갖고 있던 백비에게 많은 뇌물을 갖다바쳐 조정 내에서 오자서의 영향력을 조금씩 갉아먹는 한편, 오자서를 어려워하던 오왕 부차와 오자서 사이를 이간시키는 데에 전력을 기울였다. 당시 잇따른 승리로 교만해진 오왕 부차는, 중원의 제후들을 소집하여 [[패자]]에 오르겠다는 헛된 야망을 품었고, 이를 반대하는 오자서와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되었다. 그래도 오자서를 자기 손으로 죽이기 꺼림직했던 부차는 제나라에 대해 말도 안 되는 협박장을 써서 오자서에게 들려보냈다. 제나라의 손으로 오자서를 죽이게 하고 이를 구실로 제나라를 침공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를 간파하고 있던 제나라는 오히려 오자서를 융숭히 대접하여 돌려보냈는데 결국 이를 참지 못한 오왕 부차는 오자서에게 명검 [[촉루지검|촉루]](屬鏤)를 내려 [[자결]]을 명하였다.[* 여기에는 숨은 이유가 하나 더 있었는데, 오자서가 굳이 타국인 제나라의 유력 가문인 포씨에게 자신의 아들을 맡겼다는 게 알려진 게 컸다. 한마디로 '더 이상 자신을 지켜줄 나라도 가족도 없다(=가족은 죽을 것이며 나라는 망할 것이다)'를 예측하고 아들을 맡겼던 상황이라 안 그래도 패자가 되겠다며 자만심에 찌들었던 부차가 더더욱 열을 뻗칠만 했다. 《사기》의 판본에서는 정확한 일화는 소개되지 않았으나 위처럼 제나라에 오자서가 자신의 아들을 맡겼다는 말을 들은 백비가 부차에게 '선왕과 달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부차에게 앙심을 품고 배신하려고 한다'며 참소한 게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저술되어 있다.] 어쨌든 오자서는 그 자리에서 한바탕 간신 백비에 대한 원망과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고 '''"내가 죽으면 (부차의 관짝을 짜게) 무덤에다 가래나무를 심고, (오가 월에게 멸망당하는 것을 보게) 두 [[안구|눈]]을 뽑아 동쪽 성문에 걸어두라"'''는 [[유언]]을 남긴 다음 [[촉루지검|촉루]]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물론 이 유언을 전해듣고 부차는 대노하여 이런 불충한 자에게 무덤 같은 것도 필요없다며 그 시체를 가죽부대에 넣은 채로 [[장강]]에 던져버려서 찾지 못하게 하여 저승에서도 결코 편히 쉴 수 없을 꼴로 만들었지만, 주민들은 그를 불쌍히 여겨 근처에 사당을 지어 주었다. 이후 월의 신하 범려는, 구천이 오 정벌에 성공한 이후 구천의 성격을 간파하여 문종 등의 공신들을 주살 당하기 전에 하야하여 제나라로 건너갔고, 숙적 오자서의 비극적인 최후를 추모하는 마음에서 '치이자피'(鴟夷子皮)라고 개명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오자서 사후 10년이 지나지도 않아 그의 유언대로 '''오나라는 월나라에 의해 멸망한다'''. 결국 제나라를 굴복시킨 부차가 [[패자]]로 인정받고자 회맹을 벌이던 와중 월나라가 오나라의 수도인 고소를 말그대로 빈집털이해버린 것이다.[* 심지어 이 때 쓴 방법은 오나라가 초나라 수도를 털었을때와 거의 동일한 수공이었다.] 부차는 이를 듣고 급하게 군대를 이끌고 귀환해 월나라에 맞섰지만 처참하게 패배한 뒤 포위당해 포로로 잡히게 된다. 이후 구천은 부차에게 '너도 내 목숨을 살려줬으니 나도 한 번 정돈 못 살려줄 것도 없다'며 100호 정도의 장으로 봉해준다[* 까놓고 말하면 [[리중딱|'''너에게는 100호 정도가 딱 어울린다''']]는 소리. 왕이었던 자에게 이런 소리는 능욕이나 다름없다.]고 말했으나 오히려 부차는 이를 거절하고 저승에서 오자서를 볼 낯이 없다는 말만 남긴 채 천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뒤 자결했다. 여담이지만 오자서의 최후에 가장 큰 역할을 한 백비는 오나라가 멸망하자마자 월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간청했으나 오히려 구천에게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간신배'라는 이유로 공개처형당했다.[* 다만 이는 《사기》 <열전> 기준, 그 이전의 역사서들은 백비가 여전히 등용되었다고 했다.] 여담이지만 먼 훗날 삼국시대 [[동오]]의 권신 [[손침]]이 오자서의 사당을 훼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어서는 [[부관참시|자신이 했던 일]]과 똑같은 일을 당한 셈이다. 그 후 손침은 경제 [[손휴]]에게 암살당했고, [[손휴]]도 5년 뒤에 있다가 [[요절]]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사당을 훼손한 손침이 속했던 오나라 역시도 자신을 죽인 부차의 오나라와 한자까지 같은 국호를 사용했다. 오나라 멸망 후의 [[서시]]의 행적에 대한 가설 중에 오자서를 본래 사모했던 까닭에 임무를 마친 후 죄책감에 자결했다는 설도 있다. 정비석의 소설 《손자병법》에서 이 설을 채용했다.[* 이외에도 서시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모살당했다는 설도 있고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부차를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반대로 범려가 제나라로 튈 때 구천보다 선수를 쳐서 서시를 데려갔다는 설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