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자서 (문단 편집) == 후대의 평가 == [youtube(aHFoURmHnsQ)]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개인의 복수를 위해 충(忠)을 버린 사람이다.'라는 평가와 '폭군을 몰아내는 것은 충(忠)을 저버리는 일이 아니다.'라는 평가가 상존한다. 사실 오자서가 과거부터 비판을 받은 이유는 왕을 들이받아서가 아니라 시체를 훼손한 것 때문이 훨씬 크다. 그러나 워낙 이룬 업적이 업적인 데다가 인생역정에 비장미가 넘치다보니 후대에도 그 이름을 널리 전하고 있다. 또 유교라고 해서 왕에게 무조건 굴종하는 것을 충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맹자]]》에도 '君有大過則諫 反覆之而不聽 則易位(임금이 큰 잘못을 저지르면 간언을 하고, 반복해도 듣지 않으면 군주의 자리를 바꾼다. <만장 하>)'라고 나와 있듯이 자격 없는 왕은 왕이 아니라고 하며 오자서의 고사를 드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그가 신포서를 만났을 때 복수를 위한 집념을 절대 단념하지 않겠다고 한 표현인 '일모도원'(日暮途遠)[* 날은 저무는데 갈 길은 멀다.]은 순리와 역리를 가리지 않는 의지 관철의 위험성을 암시하기도 한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굴욕을 참았단 부분에서 나름 동질감겸 동경심을 느꼈는지 [[사마천]]이 유독 높게 평가한 인물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사기(역사책)|사기]]》의 열전은 여러 인물이 엮여서 하나의 열전이 되지만 오자서의 경우 단독으로 열전을 편찬했으며 그 내용도 타 열전에 비하면 상당히 알차고 사론에서도 '소의(小義)를 버리고 큰 치욕을 갚아 명성이 후세에 전해졌으며, 모든 고초를 참고 견디며 공명을 이룬 강인한 대장부'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사마천 본인도 궁형을 당한 후에 치욕을 감내하며 동서고금을 통틀어 위대한 사서로 추앙받는 '《사기》'를 집필한 것을 미루어, 상당히 후한 평가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자신처럼 역경을 이겨내고 합려를 패자로 옹립했다는 데 의의를 두었을지도.] 후술했듯이 오자서가 유교적 관점에서 봤을때 마냥 위인으로 떠받들기에는 뭣한 인물임에도 이정도로 편애한 걸 보면 시대를 앞서나간 덕질인 수준. 사상이나 저술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 아니라 직접 행동하는 인물상에 방랑, 성공, 몰락을 모두 겪어봤던 만큼 흥미로운 일화가 넘쳐나 사기의 열전들 중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게 볼만한 대목이다. 이후에도 오자서에 대한 칭송은 이어져 사후 1,000년 후 [[송나라]] 시대에 영렬왕(英烈王)으로 추존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장쑤성 쑤저우(소주: 蘇州)에 그를 기리는 사람들이 세운 사당인 오상사(伍相祠)가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d3802615aa.jpg|width=100%]]}}} || || {{{#ffffff ''' 오자서 사당 '오상사' ''' }}}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