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페레타 (문단 편집) === 오스트리아 === 독일어 오페레타의 개척자로는 [[프란츠 폰 주페]](Franz von Suppé, 1819~1895)가 있었다. 주페는 독일어 대본으로 작곡을 하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틀은 오펜바흐 등 프랑스 오페레타의 스타일을 따랐고, 또 [[오스트리아-헝가리]]라는 2중 왕국의 특성을 감안해 [[헝가리]]를 비롯한 동유럽이나 남유럽 민속 음악의 어법도 일부 차용해 후배 작곡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주페의 오페레타들로는 경기병(Leichte Kavallerie), 아름다운 갈라테아(Die schöne Galathée), 유쾌한 도적(Banditenstreiche), 보카치오(Boccaccio), 파티니차(Fatinitza) 등이 있지만, 오스트리아 밖에서는 상연이 극히 뜸한 실정이고 서곡들만이 자주 연주되고 있다. 주페의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 오페레타의 틀을 정립한 작곡가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였다. 주로 춤곡이나 [[행진곡]]을 작곡하던 요한 2세는 소프라노 가수였던 첫 아내 헨리에타의 충고를 받고 오페레타를 쓰기 시작했고, 오스트리아를 뛰어넘어 세계적 성공을 거두고 오페레타 하면 떠오를 만큼의 명성을 얻은 [[박쥐(오페레타)|박쥐]](Die Fledermaus)를 작곡해 오펜바흐의 라이벌로 격상되었다. 요한 2세는 생애 동안 총 16편의 오페레타를 작곡했고, 대부분 초연 때 성공을 거두었고 초연 직후 오페레타에서 [[2차 창작]]한 여러 춤곡이나 행진곡을 추가로 선보이는 비즈니스 감각도 보여주었다. 박쥐 외에 지금까지 자주 상연되는 요한 2세의 오페레타들로는 베네치아의 하룻밤(Eine Nacht in Venedig)과 집시 남작(Der Zigeunerbaron)이 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비슷한 시기에 오스트리아 오페레타계를 풍미한 작곡가들로 거지 대학생(Der Bettelstudent)과 가스파로네(Gasparone) 등을 작곡한 카를 밀뢰커(Carl Millöcker, 1842~1899), 새 장수(Der Vogelhändler)와 광산 감독(Der Obersteiger) 등을 작곡한 카를 첼러(Carl Zeller, 1842~1898)와 방랑자들(Die Landstreicher) 등을 작곡한 [[칼 미하엘 치러]], 오페라 무도회(Der Opernball) 등을 작곡한 리하르트 호이베르거(Richard Heuberger, 1850~1914) 등이 있다. 이 당시에 빈의 각 극장들은 아예 상주 작곡가를 고용해 오페레타를 정기적으로 만들어 상연할 정도로 급상승한 인기에 대비할 정도였다. 빈 오페레타의 승승장구에 힘입어 오스트리아 외에 같은 [[독일어권]] 국가였던 [[독일]]에서도 오페레타 붐이 일기 시작했는데, [[베를린]]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파울 링케(Paul Lincke, 1866~1946)는 작중의 행진곡 '베를린의 공기(Berliner Luft)'가 베를린 시의 시가처럼 애창되는 루나 부인(Frau Luna)을 비롯한 히트작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20세기에 접어들며 오페레타와 [[왈츠]], [[폴카]] 등 이전 세기에 대인기였던 춤곡들의 인기가 점차 시들해지면서 오페레타의 상연 빈도도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요한 2세에 이어 두 번째 빈 오페레타의 부흥기를 이끈 작곡가로 헝가리계 오스트리아 작곡가인 프란츠 레하르(Franz Lehár, 1870~1948)가 있었는데, 레하르는 자신의 최대 히트작 유쾌한 미망인(Die lustige Witwe)[* [[https://youtu.be/CACsWYcShrk|입술은 침묵하고(Lippen Schweigen)]]가 유명하다.]을 비롯해 룩셈부르크의 백작(Der Graf von Luxemburg), 집시의 사랑(Zigeunerliebe), 미소의 나라(Das Land des Lächelns), 파가니니(Paganini), 러시아의 황태자(Der Zarewitsch) 등을 연이어 성공시켰다. 레하르의 오페레타는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지를 무대로 하는 등 선배 작곡가들보다 더 국제적인 색채를 띠었고, 미소의 나라부터 작곡된 후기 오페레타들에서는 기존의 [[해피 엔딩]]이 아닌 다소 씁쓸한 여운을 남기는 [[새드 엔딩]]으로 끝맺는 독특한 전개 방식을 사용했다. 레하르와 비슷하게 오스트리아-헝가리 시대의 헝가리 지방 태생이었지만, 레하르와는 달리 자신의 정체성을 헝가리인으로 삼았던 에메리히 칼만(Emmerich Kálmán, 1882~1953)도 빈 오페레타의 두 번째 부흥기를 이끈 작곡가로 평가받았다. 칼만의 대표작 오페레타들로는 차르다시 공비(Die Csárdásfürstin), 마리차 백작부인(Gräfin Mariza), 서커스의 공주(Die Zirkusprinzessin) 등이 있다. 이외에 빈 오페레타의 황혼기를 대표하는 작곡가들로 왈츠의 꿈(Ein Walzertraum) 등을 작곡한 오스카 슈트라우스(Oscar Straus, 1870~1954), 달러의 여왕(Die Dollarprinzessin) 등을 작곡한 레오 팔(Leo Fall, 1873~1925), 빅토리아와 그녀의 경기병(Viktoria und ihr Husar) 등을 작곡한 파울 아브라함(Paul Abraham, 1892~1960) 등이 있다. 이 에머리히 칼만은 유대계 헝가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돌프 히틀러]]가 굉장히 좋아하던 음악가 중 한명이었다고 한다. 오히려 칼만에게 “명예 아리아인”으로 추대하주겠다고 나섰지만, 정작 칼만 본인은 히틀러를 씹고 짐싸고 [[미국]]으로 가버렸다. 결국 나치는 칼만의 음악을 유럽 내에서 금지시켜버렸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1차대전]] 종전과 함께 [[미국]]에서 건너온 [[재즈]] 등 다른 음악들이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되자 오페레타도 사양길을 걷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아돌프 히틀러|히틀러]]의 [[나치당|나치]]가 득세하면서 진행된 [[오스트리아 병합]] 후 오페레타계에서 활동하던 많은 [[유대인]] 대본 작가들이나 작곡가들도 활동 금지를 당하고 망명하거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목숨을 잃으면서 결정타를 맞았다. 전후에도 오페레타 상연과 창작은 계속 이어지고는 있지만, 사실상 [[뮤지컬]]에 전성기의 자리를 넘겨주고 현재는 주로 구작들을 중심으로 [[추억팔이]]처럼 상연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