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옥저 (문단 편집) == 기타 == * 일설에는 [[여진족]]의 일부인 '와지'가 이들의 후손이라고 하지만, 지나치게 현대 한국 한자음에만 의존한 설이라 그리 지지받지는 못한다. 특히 옥저(沃沮)라는 국명 자체가 부조(夫租)에서 와전된 것일 가능성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 얀콥스키 문화의 기원전 8세기 ~ 5세기 유적인 페스차느이 유적, 말라야포두세치카 유적에서 주조 철부를 비롯한 철기가 발굴되었고, 얀콥스키 문화의 가장 늦은 시기인 기원전 5세기 ~ 3세기 무렵으로 추정되는 바라바시-3 유적에서 제철 시설이 발굴되어 고조선의 영역으로 비정되는 동만주 ~ 서북한 지역에 비하여 더 이른 시기에 철기 사용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아시아 고대 철기 문화 연구〉, 2012. 05. 04, 국립 문화재 연구소 고고연구실.] * 얀콥스키 문화 이후 크로노프카 문화의 유적에서는 한민족에서 가장 오래된 '''[[온돌]]'''이 발견된다. 한반도로 온돌을 보급한 집단으로 추정된다. 온돌과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옥저인들의 유적지에서는 반드시 온돌의 흔적이 발견되는 반면, 옥저인들의 이웃인 [[읍루]]인들의 유적지에서는 온돌의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옥저인과 읍루인은 사서에서 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계통의 민족이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 옥저는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등 전통 행사가 없었는데, 고구려에 일찍이 복속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동예와 고구려와는 혈통이 같은 민족이나 다름없다 보니, 행사도 이들과 같거나 비슷했을 걸로 추정된다. * 옥저인들은 그들의 영토에서 나는 [[모피]]들을[* 아마 담비나 호랑이, 표범 같은 동물들의 가죽이었을 것이다.] 중국인들한테 파는 대가로 중국인들이 주는 화폐를 받았다. 그래서 오늘날 옥저의 영토였던 함경도 일대에서 발굴되는 옥저인들의 유적지에서는 중국 전국 시대 [[위나라]]의 동전이나 [[전한]]의 [[오수전]] 같은 중국 화폐들이 나온다. 옥저인들이 중국 화폐들을 들여와서 상거래에 사용했으리라고 추정된다.[* 왜 옥저인들이 스스로 화폐를 만들어서 사용하지 않았느냐 하면, 화폐 즉 돈은 단순히 만들어낸다고 곧바로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 돈의 가치를 인정해야 비로소 상거래에 사용이 가능한 신용 도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제적인 공신력이 미비한 옥저 자체의 화폐보다는 이미 동아시아에서 오늘날 미국 같은 초강대국인 중국의 화폐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더 상거래에 유리하다. 비슷한 이유로 일본 [[센고쿠 시대|전국 시대]] 오와리 지방의 영주인 [[오다 노부나가]] 또한 중국 [[명나라]]의 동전인 [[영락전]]을 그대로 들여와 사용했고, 심지어 자기 군대의 군기에 영락전 3개를 그려 넣을 만큼 영락전을 중요시했다. 조선도 [[당백전]] 발행으로 물가가 폭등하자 청나라 화폐들 들여와 썼었다. ] 그래서 옥저인들의 유적지에서는 중국 화폐들이 가득 담긴 항아리가 출토되기도 한다. 또한 옥저인들의 유적지에서는 중국 [[전국시대]] [[인상여]]가 만든 창 같은 청동기 무기들도 출토되는데, 옥저인들이 중국인들과 모피를 주고받는 교역의 대가로 청동기 무기들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 청학집에 인용된 [[통일신라]] 시대 고문헌을 참고로 하여 작성한 조선 중기 야사집인 삼한습유기(三韓拾遺記)에 의하면 [[평창 이씨]]는 [[남옥저]] 유민 후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