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온수역 (문단 편집) === 역명 유래 === '온수역은 있는데 왜 냉수역은 없나요?'라든가 'Hot Water Station' 등의 갖가지 발언들이 많이 나오는데, 실제로 이 역의 이름은 '뜨거운 물'이라는 뜻의 '온수'(溫水)에서 유래했다.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은 이 일대에 조선 초기까지 간헐천으로 인한 [[온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많이 찾아볼 수 있지만, 한반도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것이 지열로 인해 발생하는 간헐천 온천이다. 그 온천의 물이 몸이 데일 정도로 뜨거워서 이 지역의 지명으로 굳어졌다. 조선시대 이 일대의 행정구역 명칭은 [[부평]]도호부 수탄면(수곡면) 남촌 온수리였다. [[세종대왕]]이 이 지역의 온천을 찾아가려고 하자 백성들과 그 지역 아전(향리)들이 임금이 오지 못하게 간헐천 온천을 막았다. 임금이 온천욕을 하러 오게 되면 지역에 [[금산]]이 걸려서 강제로 이주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왕을 상대로 님비를 시전한 결과 온천욕을 즐길 수 없게 된 세종은 분노하였고 결국 이 지역 아전들을 [[고문]]한 뒤 이 일대를 부평도호부에서 부평현으로 2등급이나 강등을 시켰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84권 21년 2월 21일 5번째 기사, 90권 22년 8월 27일 2번째 기사, 92권 23년 1월 7일 1번째 기사, 92권 23년 2월 2일 3번째 기사.] 아전들의 행동은 '기군망상죄(欺君罔上罪)'에 해당하며, 조선시대 기군망상죄는 '반역죄'와 동급으로 처벌되었으므로 세종의 처벌은 오히려 관대한 편이었다. 이 온천 사건으로 부평현으로 강등된 상태가 유지되었다가 사건이 터진지 7년 뒤에 부평도호부로 복구되었다. 저 사건 후 수맥이 막혀서 온천이 재개발되는 일은 없었다.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 군사정권 때에 이르기까지 수익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온수동 일대의 온천을 재개발하려는 움직임이 꾸준히 있었지만 결국 온천수맥을 찾는데 실패하면서 그 자리에 빌라촌이 들어섰다. 나중에 온천수 자체는 찾았는데, 온천 수맥이 흐르는 곳이 7호선 온수역과 가까운데 있는 데다가 온천수맥이 있는 와룡산 일대가 현재 그린벨트로 묶여있는 터라 결국 현재까지 온천 개발은 감감무소식이다. 애초에 향리들이 온천을 막은 이유가 현대의 그린벨트 개념과도 비슷한 금산이 걸리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때 막힌 온천을 다시 찾아 개통하려는데 오히려 그린벨트에 묶여서 다시 개발되지 않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