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십리 (문단 편집) === 지명의 유래 === [[조선]] 초,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의 명을 받아 새로운 도읍지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던 중에 지금의 왕십리 일대를 지나고 있었는데, 이곳을 명당이라 생각하여 도읍으로 정하자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 순간 한 노인이 소를 끌고 지나가면서 소에게 "야 이 무학같이 미련한 소야"라고 하자, 무학이 깜짝 놀라 그 노인에게 가서 "혹시 도읍이 될 만한 곳을 아십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노인은 '''"북서쪽으로 십리를 더 가보시오. 도읍이 될만한 터가 있을 것이오"'''라고 말하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버전에 따라 다르게 나오기도 하는데, 그 일대에 사는 한 노인이 소를 이용해 밭을 가는데, 이 소가 자꾸 엉뚱한 곳으로 가자 "이 무학 같은 놈아! 제대로 된 곳을 두고 왜 자꾸 엉뚱한 곳을 가느냐? 왕십리하란 말이다!"라고 호통을 치고 무학은 그 자리에서 왕십리를 떠올렸다는 버전도 있다.] 무학대사가 그 말을 따라 십리를 더 걸어 나온 곳이 지금의 [[경복궁]]이다. '''갈 왕([[往]]) + 열 십([[十]]) + 거리 단위 리([[里]]) = "왕십리"'''가 된 것이다. 바로 옆의 [[청량리]]와는 달리 왕십리의 리는 "마을 리(里)"가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해당 지역의 동(洞)이름도 '''(상/하)왕십동'''이 아닌 '''(상/하)왕십리동'''이다. 노인이 사실은 [[도선대사]]의 혼백이었다는 전승도 있다. [[무학대사]]가 [[경복궁]] 터를 보고 나서 '그런 곳을 점지할 사람은 도선대사밖에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으나, 이미 다시 찾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 동명 중에도 [[도선동]]이 있다. 무학대사의 이름도 인근 무학초등학교, 무학중학교, [[무학여자고등학교]], [[하왕십리동]] 무학봉 등에 쓰이는 등, 도선대사와 무학대사에 관한 지명과 교명이 많다. 사극 [[용의 눈물]] 23화에서도 이에 관해 야사로서 소개한 에피소드가 나왔다. 그러나 명칭에 대한 위 이야기는 신빙성이 좀 떨어지는데, 고려시대에 이미 인근 지역을 '왕심(旺心)' 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표기가 변화하여 현재의 왕십리가 됐다는 설이 좀더 설득력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애초에 무학대사는 천도에 그렇게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하륜]]이나 [[정도전]] 등에 의해 천도가 구체화되었다고. 물론 그런 거 다 떠나서 태조 [[이성계]]가 기득권이 꼴 보기 싫어서 천도하자고 떼쓴 게 가장 크다.] 한자표기 또한 현용 중인 往十里만 있었던 게 아니라 王十里[* 이걸 직역하여 왕십리를 '[[킹스 크로스]]'라고 일컫는 개드립도 [[http://www.ssec.or.kr/board/board_write?division=NO&idx=414|존재]]한다. 물론 그 역도 성립하여 런던, 시드니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킹스 크로스'를 한자로 직역하여 왕십리라고 부른다.], 王尋里 등이 섞여 쓰이는 등 이미 당대에도 중구난방이었다. 이 때문인지 왕'''심'''리는 현대 기준에서는 분명 오타인데도 오타로 취급되지 않는다.[* 참고로 [[정읍]]에는 진짜 왕'''심'''리가 있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