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십리 (문단 편집) === 전근대 === 995년([[고려]] [[성종(고려)|성종]] 14년), 전국에 12[[목(행정구역)|목]](牧) [[양주시/역사|양주목]](楊州牧)에 속했다가, 1067년([[문종(고려)|문종]] 21년)에 [[남경]](南京)이 설치될 때 이에 속했다. 그 이후 쭉 남경에 속해 있다가 [[조선]]이 개국한 이후인 [[1395년]], 한양으로 천도를 단행하면서 [[사대문안]]을 [[한성부]]로 정하고 그 외 지역은 [[경기도|경기좌도]] 양주군에 속하게 했는데, 왕십리도 이때 양주군에 속했다. 그러나 [[1424년]]([[세종(조선)|세종]] 6년), 한성부의 인구가 점차 늘어나고, 공신들에게 지급할 땅을 나누어 주기 위해 [[흥인지문]]과 [[광희문]] 바깥 지역을 한성부 동부와 남부에 편입하게 되었다. 이때 동부 성외 지역은 인창방(仁昌坊)과 숭신방(崇信坊)으로 나누어 관할하게 하였는데, 왕십리는 지금의 [[마장동]], [[사근동]]과 함께 동부 인창방에 속하게 되었고, 현재 성동구의 나머지 지역들은 남부 두모방(豆毛坊)에 속했다. [[1751년]]([[영조]] 27년)에는 동부 인창방 왕십리계(往十里契)에 속하였고, [[고종(대한제국)|고종]] 초에 잠시 왕십리1계와 왕십리2계로 나누어졌다가, [[1894년]] 갑오개혁을 단행하며 다시 왕십리계가 되었다. 이때, 지금의 [[황학동]], [[무학동]], [[흥인동]], [[신당동(서울)|신당동]] 일대가 모두 왕십리계에 편입되었고, 왕십리계는 동부 인창방에서 남부 두모방으로 잠시 옮겨진 듯하다. 조선시대의 왕십리는 광희문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지나가는 곳이었으므로 시전이 발달하게 되었고, 따라서 상인 계층이 주로 살았다. [[서울 사투리]] 중에 '~걸랑' 하는 것이 왕십리 일대에서 생겨난 특유의 방언인데, 이 당시 이 일대에 거주하던 중인(中人) 계층에서 쓰던 말이라고 한다. 조선 말엽에 이르면 군인들도 이 일대에 많이 거주한 모양인데, [[임오군란]] 당시 구식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킨 중심지 역시 왕십리였고, 청군이 진압할 당시에 왕십리 일대가 쑥대밭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