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윤 (문단 편집) === 최후 === 왕윤은 모든 원흉인 [[동탁]]만 제거되면 그 이후엔 크게 거리낄 것이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동탁 사후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으며 점차 교만해진다. 왕윤은 녹상서사로 의동삼사로 임명된 [[여포]]와 함께 조정을 장악했다. 동탁의 부하 [[이각]], [[곽사]] 등은 동탁이 죽었다는 소식에 병주인 남녀 수백 명[* 왕윤, 여포 등을 필두로 동탁 주살의 주요 세력이 병주 출신이다.]을 학살했다. 이에 왕윤이 이들에게 절대 사면불가 방침을 고수하자 결국 이각 등은 [[삼보의 난|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또 동탁의 잔당들을 무장해제시켰는데 그들에 대한 사면령은 거부했기 때문에 동탁이 근거지를 두고 있던 양주에서는 "왕윤이 동탁의 동향민들인 양주인들을 모조리 죽인다 [[카더라]]"는 유언비어가 퍼졌고 결국 이각, 곽사의 반란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구주춘추》에 따르면 동탁의 잔당이 두려워하며 섬현에 주둔했는데 [[호진(후한)|호문재]](胡文才)와 [[양정(삼국지)|양정수]](楊整脩)는 모두 양주 출신 유명인들로 왕윤과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왕윤은 이들을 불러 양주인을 모두 죽이려 한다는 오해를 풀게 했는데, 좀 좋게 말해주지 않고 "관동의 서자(= 쥐 새끼)들을 경들이 불러오라."라고 오만하게 말했고 이해 두 사람이 오해를 푸는게 아니라 동탁 잔당의 군사들을 되돌아 오게 했다고 한다. 사이도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너무 오만하게 나간터라 애당초 왕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저 두 사람이 지어낸 말이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후한서 기록에 의하면 여포가 동탁의 병사들에 대한 사면을 수차 주장하자 "이들은 원래 죄가 없었는데 괜히 역적으로 규정하고 사면하면 오히려 의심하게 만든다."는 이상한 논리를 들이대며 반대했다고 한다.[* 이건 역사를 전혀 모르는 소리이다. 중국사에서 하수인들을 사면해서 성공적으로 품은 사례는 넘치며, [[항우]]처럼 사면을 안 했다가 해를 본 사례도 적지 않다.] 이각과 곽사는 장안을 치자는 [[가후]]의 계책을 썼고 서쪽으로 가며 군사를 거두어 장안에 도착했을 때는 군사가 10여 만명이 되어, 곧 장안성을 포위했다. 왕윤은 여포 등을 보내 이를 막게 했지만 여포가 패배한 데다가 결정적으로 왕윤의 오만한 태도에 반감을 갖고 있던 옛 동탁 휘하의 장교들이 반란군과 내응하며 칼을 돌렸기 때문에 전세가 완전히 기울게 된다.[* 정확히 덧붙이자면 [[이몽]], [[왕방]]이 왕윤에게 등을 돌렸으며 여포는 이각, 곽사의 유인책에 넘어가고 본래 장안성 수장이었던 [[장제(후한 군벌)|장제]], [[번조]]가 호응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성이 함락되기 전에 여포는 도망치는데 문 밖에 말을 매어두고 왕윤에게 같이 달아날 것을 권하나 왕윤은 "단지 국가를 편안히 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오. 그렇지 못한다면 몸 바쳐 죽으리다. 조정의 어린 임금이 나를 의지하는데 어려움에 임했다고 구차하게 벗어나려하는 건 내가 차마 못 할 짓이오. 그대는 노력하여 관동의 여러 공들과 협력하여 나라를 위해 힘써주시오."라는 멋들어진 대사를 남긴다.[* 조조전에서는 자살로 기록되지만 타 매체에서는 이각, 곽사 등에게 살해당하는 묘사로 나온다.] 결국 왕윤은 향년 55세로 사망하고 그 일족들도 모두 살해되었으며 그의 시체는 저자에 효시되었다. [[헌제]]는 왕윤의 죽음에 슬픔을 감추지 못했고 장안의 남녀노소 중에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왕윤의 시체는 옛 부하였던 [[조전#s-2]]이 수습해서 장사를 지냈다. 아들 둘을 비롯해 일족 10여 명이 모두 처형되었으나, 조카 왕신(王晨), [[왕릉(삼국지)|왕릉]](王凌) 형제는 몰래 성벽을 타 넘고 간신히 도망쳐 살아났다. 왕릉은 후에 [[위(삼국시대)|위나라]]의 신하가 되었으며 오랫동안 봉직한 뒤 [[사마의]]와 맞서다가 전사한다. 왕윤 사후에 함께《효경(孝經)》을 강론할 수 없게 된 전 태사령 왕립(王立)[* 천문을 보고 한나라가 쇠하고 진(晉)이나 위(魏)가 흥성할 것이라고 말했다가 [[조조]]에게 경고를 받은 인물이다.]이 혼자 쓸쓸해 하였다고 한다. 뒷날 이각에게서 벗어나 [[조조]]의 보호로 [[쉬창|허창]]으로 천도한 헌제는 왕윤의 충절을 기려 그를 호분중랑장에 추증하고 그의 손자 왕흑(王黑)을 안락정후로 봉하고 식읍 300호를 내렸다.[* 다만 왕윤에게는 왕개, 왕경정 두 아들이 있었는데, 왕흑은 그 중 누구의 아들인지는 모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