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윤 (문단 편집) == 평가 == >'''"[[수지청즉무어|물이 지나치게 맑으면 물고기가 없다]]."''' >'''"[[마오쩌둥|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 긍정적으로 평가될 때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고 백성들을 위하려다 안타깝게 실패한 [[충신]]''' 정도로 여겨진다. 평소 고결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존경을 받았으나, 권력을 잡은 뒤로는 그 성격이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 '''[[정의]]에 대한 집착'''이 그에게 있어선 실책이었지만 그것을 결점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애초에 한나라 황실에 대한 [[충성]]과 [[정의]]에 대한 꼬장꼬장한 고집을 가진 왕윤 같은 충신이 있었기 때문에 동탁에 대한 응징이 이루어진 셈이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결점이건 아니건 그 실책이 이각과 곽사의 반란으로 이어져 결국 한 왕조를 전면적으로 붕괴시키는 결과가 되었으므로 가볍게 볼 수도 없다. [[동탁]] 사후 그가 좀 더 융통성 있는 모습을 보였으다면 이각과 곽사의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점이 아쉬운 부분이다. '''왕윤은 당시의 상황을 "군사력을 장악한 동탁이 갑자기 사망하고 권력에 공백이 생긴 비상사태"가 아니라 "황실이 그 권위를 회복하고 정상으로 돌아간 상태" 정도로 지나치게 관념적으로 파악한 듯이 보인다.''' ~~[[위정척사파]]~~ 이런 비상시에는 군대의 움직임에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왕윤은 군을 이상할 정도로 등한시했기 때문이다. 동탁이 사망하고 그의 군사들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왕윤에게는 동탁의 군사력을 자신 (혹은 황실)의 세력으로 흡수하거나, 최소한 중립적인 입장으로 묶어놓고 스스로의 군사력을 양성하거나, 혹은 외부의 근왕 세력에게서 군사력을 빌려서 동탁의 잔당을 토벌하는 등의 여러 선택지가 있었다. 하지만 왕윤은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다. 동탁의 잔당들을 흡수하거나 사면하지 않으면서도 무장 해제를 시도했고,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맞설 군사력을 외부에서 빌려오지도 않았다. 비록 이각, 곽사가 왕윤에게 위협을 느끼고 군대를 해산할 생각도 했으니 ([[가후]]의 [[선동]]만 아니었다면) 강경책이 전혀 효과가 없던 건 아니었지만, 동탁의 잔당이 그 군사력으로 반란을 일으킨다는 당연한 가능성을 왕윤이 과연 고려했는지는 의문이다. 사실 자신의 대업이 정당성이 있었고 한 왕조를 망가뜨린 동탁의 주구들은 언젠가는 죄값을 치루어야 했을 것이며 자신에 동조하는 [[여포]], [[서영(삼국지)|서영]]과 같은 장수들도 있었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선 나름대로 자신감이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이런 면에서 보면 기본적으로 한나라의 치세에서 태어나 성장한 한나라의 중신이었던 왕윤의 입장에서는 '''한 황실 중심의 [[천하]]'''에 대한 관념이 너무 확고하여 그 외의 상황에 대해 상상하지 못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후세 사람인 우리는 [[황건적의 난]]에서 [[십상시의 난]], [[동탁]]의 집권을 거치면서 한나라가 이미 멸망 수순에 접어들었음을 알고 있지만... 한나라의 충신인 왕윤 입장에서는 400년에 이르는 한나라의 치세가 당대에 무너질 것이라고 판단하기 쉽지 않았고, 이 때문에 조정과 황실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 황실의 권위와 영향력 자체가 무너지고 있다고 판단하지 못하고 '''[[권신]] 동탁의 영향력에 일시적으로 조정의 권위가 위축된 상태'''로 파악하여 권신 동탁만 제거하면 다시 조정과 황실의 영향력이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라 판단하였으나, 실상은 동탁을 제거한다고 해도 자생이 어려울 정도로 한나라의 체제 자체가 약화된 상태였다는 것. 사실 이각이나 곽사가 왕윤의 위협에 굴복하여 군대를 해산할 생각도 했다는 점을 보면 이 시점까지는 한나라의 황실 및 조정에 어느 정도의 권위가 남아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니 오판이기는 했지만 완전히 어처구니 없는 착각이었다고 볼 정도는 아니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왕윤의 시도가 실패하고 황제가 [[이각]]과 [[곽사]]의 전리품이 되었다가 겨우 탈출한 뒤 [[조조]]에게 옹립되어 겨우 체면치레나 할 수 있게 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권위까지 완전히 상실하고 한나라는 완전한 멸망 수순을 밟게 되지만... 이와 같은 왕윤의 오판을 전후의 다른 인물들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데, 왕윤의 철천지 원수라 해야 할 [[십상시]]들이 저지른 오판이 의외로 왕윤의 오판과 비슷하다. 황제와 황후를 손에 쥐고 있고 조정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던 십상시들은 [[하진]]만 제거하면 황실의 권위를 뒷배로 삼아 다시 자신들이 정국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겠지만... 황실과 조정의 권위가 십상시의 예상보다 훨씬 약화되어 있었기에 분노한 하진 세력의 역습을 전혀 견뎌내지 못하고 끔살당하고 만 것. 물론 왕윤 입장에서야 십상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력한 정당성과 명분을 가진 입장이었고, 무리한 권력욕 때문에 오히려 자충수를 둔 꼴인 십상시에 비해 한실의 재건이라는 목표를 위해 통탁의 제거는 필수적이었음을 생각하면 단순히 1:1로 비교하기엔 왕윤이 좀 억울하긴 하겠으나, 황실과 조정의 권위를 실제보다 높게 평가한 것이 몰락의 원인이라는 점에는 공통점이 있는 것. 반면, 왕윤 이후 비슷한 방법으로 권신(= 조조)를 제거하려 했던 [[동승]]의 경우, 조정 자체의 권위로는 더 이상 현실권력을 제압하기 어려움을 인지하고 유비 등 수도 내의 조력자들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조조를 제거한 후 조조파 자체를 일소하려면 수도 내의 조력자뿐 아니라 (연의에서처럼) 외부의 군벌까지 끌어들였어야 했겠지만... 어쨌건, 왕윤과는 달리 동승의 조조 제거 시도가 실패한 것은 밀고 등 우연적 요소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동탁 시기에 비해 권신의 권위와 영향력, 정국 장악력은 더 강력해지고 황실의 권위는 더 실추했다는 시대적 상황과도 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동탁 암살 이후 어느 정도 국정 장악력을 발휘할 수 있던 왕윤과는 달리 동승의 경우 설령 조조 제거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강력한 조조파의 반격을 감당할 반격이 도무지 막막한 것. 이를 통해 볼 때 왕윤의 시도는 실질적으로 한의 재흥[* 황실과 조정의 재건을 통한 한의 재흥이다.]을 이룰 가능성이 있던 사실상의 마지막 시도였다고 보아도 크게 무리한 추론은 아닐 것이다. 반대로 왕윤이 당시의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대처했다면 이후의 정국이 어떻게 흘러갔을지 역시 흥미로운 문제인데... 만약 왕윤이 '''[[한나라]] 황실과 조정의 권위가 스스로의 유지가 어려울 정도로 실추된 상태'''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이 상황에서 한실 재건을 시도했다면 일단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스스로 현실적인 권력(특히 군사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한나라 황실과 조정이 스스로를 유지할 힘이 없는 이상 일단 힘을 가진 누군가가 한실을 지탱해줘야 하는 것. 즉, 군사력과 정치력을 확보한 왕윤이 황제를 옹립하고, 황제의 권위를 빌어 조정의 영향력에서 이탈하고 있는 군웅들을 복속시킴으로써 한나라의 영향력을 복구하고 이를 통해 황실의 권위까지 회복시키는 길을 선택해야 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건 [[조조]]가 선택한 길과 똑같다(...). 문제는 "왕윤에게 조조와 같은 성과를 낼 만한 재능[* 특히 군사적 재능이다.]이 있는가?" 그리고 "처음 가졌던 목표는 '''한 황실의 재건'''이었다 할지라도 세력 확장을 거듭하면서 자의로, 또는 주변 사람들에게 떠밀려서라도 뜻이 바뀌지는 않는가?"의 여부겠지만.[* 특히 이 시점에서 나이가 적지 않았던 왕윤이므로 누군가 다른 사람이 중도에 왕윤의 지위를 이어받아야 할 것이고, 이 경우 그 후계자가 다른 마음을 먹을 가능성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