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전 (문단 편집) ==== 초나라의 멸망 ==== 왕전은 뛰어난 전과를 올린 장군이었지만, 나이가 들자 진왕도 그를 점점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진왕은 초나라 정벌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왕전은 적어도 60만은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신(전국시대)|이신]]은 20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진왕은 이신의 안을 택했고, 자신의 처지를 실감한 왕전은 퇴직하고 빈양으로 물러났다.[* 《사기》의 <백기왕전열전>에 의하면, 진왕이 왕전과 이신의 말을 동시에 듣고 왕전도 늙었다고 평하며 이신을 칭찬하고 그의 안을 택했다. 자세한 정황은 나오지 않았지만, 진왕이 왕전과 이신을 은밀히 3자대면한 게 아니라면 왕전은 보는 눈이 많은 조정 한복판에서 왕에게 대놓고 늙었다며 구박을 받았다는 말이 된다. 설사 진왕이 왕전과 이신을 은밀히 만났다고 하더라도, 젊은 이신의 면전에서 왕전을 구박한 시점에서 왕전의 입지는 수직으로 하락한 것이나 다름없다. 어느 쪽이든 처세술의 달인이었던 왕전이 위기를 느낄 만했던 것이다.] 이신과 부장 [[몽염]]의 20만 대군은 초반에는 승승장구했으나, 초의 [[명장]] [[항연]]의 책략에 대패하고 말았다.[* 이신과 몽염의 패배에 대해서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이들의 패배는 <왕전 열전>에만 나오고, <초세가>, <진시황 본기>, <이장군 열전>, <몽염 열전>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기록이라 교차검증이 안된다.] 다급해진 진왕은 왕전을 직접 찾아가 다시 복귀할 것을 청했다. 재차 60만 대군을 요구해서 진왕의 승낙을 받은 왕전은 [[몽무]]를 부장으로 삼아[* <몽염 열전>에 몽무가 왕전의 부장으로서 초나라와의 전쟁에 종군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초나라를 정벌하러 출전했다. 이 60만 대군은 당시 진나라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이어서 진왕은 내심 반역을 걱정했다. 이를 간파한 왕전은 출전하기 전에 자신은 진나라를 위해 싸웠음에도 제후에 임명되지 못했다고 호소하며 보상을 청했고, 초나라군과 대치하는 동안에도 수차례 사자를 보내서 자손 대대로 먹고 살 수 있는 많은 토지와 저택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누군가가 너무 지나친 게 아니냐고 왕전에게 묻자, 왕전은 반란을 걱정하는 진왕을 안심시키려고 하는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쿠데타|나라를 통째로 먹을 생각이라면]] 굳이 왕에게 보상을 요구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재물을 요구하여 자신은 반역자가 아니라 수당을 바라는 충직한 부하라는 것을 계속 강조했던 것이다. 왕전의 보신책은 단지 본인의 안위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전국시대가 막바지에 접어들며 변한 전쟁의 속성[* 철기시대가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넘어가던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학자들은 전국시대부터 대량 생산되기 쉬운 철기가 보급되면서 본격적인 물량전이 시작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을 파악한 왕전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장기전을 계획했다. 그는 이전의 승리로 사기가 오른 초나라군을 약화시키고 쉴새없이 전쟁에 동원되어 지친 진나라군을 쉬게 하다가, 단번에 승기를 잡아 전세를 기울게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장기전은 군주에게 의심을 받아 틀어질 위험이 매우 높았다는 점이다. 바로 전 세대에는 멀쩡한 지휘관이 교체되는 바람에 허무하게 끝난 [[장평대전]]이라는 전례가 있었고, 왕전 본인도 이목이 조나라 조정의 신뢰를 잃는 바람에 제거당하는 것을 똑똑히 본 사람이었다. 염파와 이목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왕전은 진왕을 안심시켜야 했다. 이미 진왕의 눈 밖에 난 전적이 있었기에 더더욱. 신하를 굳게 믿은 [[세종(조선)|세종대왕]]마저 김종서를 의심한 것[* 김종서가 북방에 부임한 지 5년이 지난 후 김종서에 대한 악평이 돌기 시작했다. 세종은 처음에는 거짓말이라며 일축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대놓고 김종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때맞춰 범찰이라는 이가 300여 호를 이끌고 [[이만주]]에게 귀순한 후 세종에게 김종서에게 죄를 지어 어쩔 수 없었다는 글을 보내자, 세종은 김종서의 작은 허물을 문제 삼지 않았는데 이런 일까지 일어나니 부끄러울 뿐이라며 노한 기색을 드러냈다. 다행히 [[황보인]]의 노력 덕에 김종서는 의심을 벗어났고, 이후 김종서에 대한 악평은 박호문의 음해로 밝혀졌다. 박호문은 사형을 받아 마땅했으나 여진 정벌때 공을 세운점과 독자라는걸 감안하여 곤장 100대를 맞고 유배를 갔다.]을 감안하면, 의심이 많을 수밖에 없던 진왕[* 동생 성교의 난, 친어머니 조희와 [[노애]](嫪毐)가 일으킨 난, [[여불위]](呂不韋)의 전횡을 겪었다.]에 대한 왕전의 처세는 합리적이었다. 왕전의 보신책은 적중했다. 진왕은 안심하며 왕전을 교체하지 않았고, 왕전은 초나라군을 상대로 1년 동안 장기전을 벌일 수 있었다.[* 이를 두고 진나라와 초나라 사이의 국력 차이가 이미 전쟁의 승패를 결정할 만큼 크게 났던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20만이 패하자 60만을 보내며, 그 60만을 1년 동안이나 먹여살리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기록에 의하면 왕전의 군대는 매일 양과 소를 잡고 훈련을 시켜 사기를 높였다고 하니, 훈련병들은 굶주리기는 커녕 주기적으로 고기까지 먹을 수 있었다는 말이 된다.] 대치하는 과정에서 진나라의 병사들은 투석, 멀리뛰기 시합을 할 정도로 체력이 쌓였고, 이를 들은 왕전은 이제야 싸울 수 있겠다고 판단하고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다. 초군은 수차례 싸움을 걸어도 진군이 응하지 않자 결국 후퇴했고, 기회를 잡은 왕전은 단 한 번의 전투로 초군을 대대적으로 격파했다. 이후에는 최후의 저항을 하던 [[항연]]과 [[창평군]]을 몽무와 함께 출진하여 죽였고,[* <몽염 열전>, <초세가>, <진시황 본기>에 왕전과 몽무가 항연과 창평군을 죽이고 초나라를 멸망시켰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들의 기록이 조금 엇갈린다. <몽염 열전>에 의하면 몽무는 왕전이 60만 대군과 함께 출진했을 때부터 왕전의 부장으로 종군하여 그와 함께 초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항연을 죽였으며, 다음해에 초나라를 다시 공격하여 초나라의 왕 부추를 생포했다. <초세가>에서 몽무는 왕전이 항연을 죽인 후에 등장한다. <몽염 열전>과 <초세가>는 창평군을 언급하지 않았다. 반면에 <진시황 본기>에 의하면 항연은 왕전이 초나라의 대군을 격파한 후에야 창평군을 초나라 최후의 왕으로 옹립했고, 이후에 몽무가 등장하여 왕전과 함께 항연 및 창평군을 죽였다.] 수도까지 점령하여 초나라를 멸망시켰다. 왕전은 이 기세를 앞세워 장강을 건너 남진해 백월(百越)까지 공략했다. 이 대공을 인정받아 왕전은 무성후(武成侯)에 봉해졌고, 아들 왕분 또한 상술했듯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연나라의 잔당은 물론이고, 위나라와 제나라도 멸망시켰다. 부자가 여섯 나라 중 다섯을 멸망시킨 것이다. 덕분에 왕씨 가문은 [[몽오]], [[몽무]], [[몽염]]으로 이어지는 몽씨 가문과 함께 진나라 군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