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정복고 (문단 편집) === 일시적인 왕정복고 사례 === [[프랑스]]의 경우는 [[프랑스 대혁명]]으로 [[루이 16세]]가 처형되고 여러 차례의 왕정복고가 있었다. [[루이 17세]]가 탕플 감옥에서 외로이 죽어간 이후 망명 간 [[루이 18세]]에 의해 여러 차례 왕정 복고 시도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고[*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이후엔 나폴레옹에게도 접촉했지만 거부당했다.] 대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제정을 펼쳤다. 나폴레옹이 쫓겨난 이후 부르봉 왕조가 돌아왔다가 다시 [[백일천하]]로 나폴레옹의 자유 제정이 복고되었으나,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부르봉 왕정복고|다시 부르봉 왕조가 들어서]] [[샤를 10세]] 시절까지 이어졌다. 다시 혁명으로 [[7월 왕정|오를레앙 왕조로 교체]]되었는데, 다시 1848년 혁명으로 [[루이필리프]]가 퇴위함으로 다시 공화국이 된다. 그런데 첫 대통령인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852년에 제정을 선포함에 따라 다시 제국이 됐다(!). 1870년 [[보불전쟁]]에서 패배해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고 나서야 제국은 폐지된다. 이후로도 오랫동안 [[부르봉 왕조]]의 복고가 지지를 받았으나 부르봉 왕조의 계승자인 [[앙리 5세|샹보르 백작 앙리]] 본인이 거부했다. 사연은 이렇다. 샹보르 백작은 자식이 없는 까닭에 그의 사후 왕위가 [[오를레앙파]]로 넘어갈 것으로 예상되었다. 두 눈에 흙이 들어가는 한이 있어도 부르봉의 배신자이자 '입헌왕정'파인 오를레앙파가 왕좌에 오르는 것을 막고 싶었던 샹보르 백작은, 기어이 삼색기는 공화정과 오를레앙의 상징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떼를 부려 모든 복고 공작을 와해시켰다. 그렇게 [[프랑스]]는 [[제정]] 폐지 이후로 그냥 [[공화국]]이 돼서 현재까지 이어지게 된다.[* [[독일 제국]] 내부에선 해리 폰 아르님 주불 독일 대사를 비롯해서 보나파르트 제정복고를 주장하는 세력도 있었는데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공화국으로 남아야 프랑스를 포위하는 군주국 대불 동맹이 성립되기 쉽다고 이를 거부했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아이티]]도 이 경우였다. 최초 독립 이후 [[장 자크 데살린]]이 자신을 [[황제]] [[자크 1세(아이티)|자크 1세]]라고 칭하며 [[아이티 제1제국|아이티 제국]]을 개창했는데 얼마 안 가 데살린이 암살당하면서 제국이 해체되었다. 이후 [[앙리 크리스토프]]가 [[앙리 1세(아이티)|앙리 1세]]라 칭하면서 아이티 북부에 [[아이티 왕국]]을 선언했다가 앙리 1세가 암살당한 뒤 공화정으로 통일되었다가, [[대통령]] [[포스탱 엘리 술루크]]가 황제 [[포스탱 1세]]로 즉위하면서 [[아이티 제2제국]]을 선포하였다. 아이티 제2제국은 좀 오래가나 싶었는데 다시 쿠데타가 일어나 이후부터 지금까지 쭉 공화정이다. [[중국]]의 경우에는 [[신해혁명]]으로 무너진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 푸이가 1917년 [[장훈복벽]]으로 복위하여 열흘간 재위했으나 공화주의자 [[펑위샹]]이 [[북경사변|베이징을 점령]]하고, 자금성에서 청 황족을 내쫓은 [[핍궁사건]]이 발발한다. 이후 [[중화민국/국민정부|국민정부]]의 [[장제스]]가 푸이에게 [[북양정부]]가 한때 약속했던 [[청나라 소조정|청 황실 우대]]를 부활시켜주겠다고 제안했으나, [[동릉 도굴 사건|황릉 도굴 사건]]으로 황제고 뭐고 이미 모든걸 포기한 푸이는 거절하고 만주로 건너갔다. 푸이는 [[일본 제국]]이 [[만주사변]]으로 만주를 점령하자, 괴뢰국인 [[만주국]]을 수립하고 옹립되어 상징적 황제가 되었다. 그외 1911년 청나라 체제로의 복귀를 목표로 한 종사당(宗社黨)이란 왕당파 정당이 있었지만 효과가 없었고 1916년에 해산되었다. [[멕시코]]는 1823년 [[아구스틴 1세]]가 쿠데타로 쫓겨난 이후에 1864년 [[나폴레옹 3세]]에 의해 괴뢰국이 되면서 [[멕시코 제2제국|멕시코 제국]]이 되고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아노 1세|막시밀리안 황자]]를 데려와 막시밀리아노 1세로 제위에 앉혀 공화정이 제정으로 전환되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외세가 세운 황제라는 이유로 3년만에 반란군에게 포위되었고, 프랑스의 외면 속에서 막시밀리아노도 총살되면서 사실상 왕정복고로 쳐주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이보다 훨씬 이전인 1820년에도 미국이 [[나폴레옹]]의 형으로서 미국에서 살던 [[조제프 보나파르트]]에게 멕시코 황제를 제의하였으나 허수아비 왕 노릇은 지긋지긋하다며 거절했던 일이 있다. 멕시코 내부에서는 괴뢰 제국을 부인하며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을 정당한 집권자로 여기고 있다. [[그리스]]도 1924년에 [[그리스 왕국|왕정]]이 폐지되고 [[그리스 제2공화국|공화정]]으로 바뀌었으나 1936년 [[요안니스 메탁사스]] 장군이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에 왕정을 복고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67년 군사 쿠데타로 왕이 쫓겨나고 1973년에 [[그리스 군사정권|군사정권]] 주도하에 공화국이 되었다가 1974년 군사 정권 퇴진 후 국민투표에 의해 민주 공화정으로 개헌이 확정되면서 공화정 국가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헝가리]]의 경우에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붕괴 이후 벨라 쿤에 의해 공산주의 국가가 건설되었으나 루마니아 왕국군과 연합한 [[호르티 미클로시]]의 공격으로 공화정이 붕괴되고 왕정이 복고되었다. 그런데 호르티 미클로시는 왕정은 복고했으되 국왕을 옹립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호르티의 집권이 허가된 이유 자체가 공화정이 아니라 왕정으로 간다는 전제조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호르티가 자신의 충신임을 믿어 의심치 않고 스위스에서 달려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오헝제국]]의 마지막 황제 [[카를 1세]]는 체포한 다음 추방해 버렸고[* 다만 이는 호르티 개인의 권력욕 때문이라기보다 현실적인 상황 때문으로, 가장 가시적으로는 당시 소 협상국이라 불리며 연합한 이웃나라들 체코슬로바키아·루마니아 왕국·유고슬라비아 왕국이 합스부르크 왕가에 극도로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카를 1세가 헝가리로 가서 부다페스트로 진군하며 왕위 복귀 직전에 이르렀던 때에 체코와 유고는 아예 군대를 동원해 헝가리 국경에 데려다놓고 왕정복고가 이루어질 시 침공하겠다며 무력시위를 하였다. 카를 본인도 이를 감안해서 프랑스의 지지를 얻어놓았으며 이를 통해 주변국의 반발을 꺾겠다는 논리를 폈지만 프랑스 정부가 부인하며 무산되었다. 실제로 다소 복잡한 정치적 계산이 얽혀있었지만 서방의 강대국들도 대체로 합스부르크 왕정복고에 긍정적이지 않았다.] 자신은 섭정 자리에 앉아 [[홍철 없는 홍철팀|함대 없는 제독이 왕 없는 왕국]]을 통치하는 해괴한 통치 체제를 이어갔다. 어찌보면 스페인의 프랑코 총통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는데[* 프랑코 역시 1947년 이후부터 왕 없는 왕국의 섭정으로 스페인을 통치했고 사후에 후안 카를로스 1세에게 왕좌를 주었다.] 만약 호르티가 죽을 때까지 권좌를 유지했으면 어떻게 했을지 호사가들의 궁금심을 자극한 대목이다. 스페인처럼 자기 손으로 왕을 옹립했을지 그리스처럼 왕조를 폐지했을지 아니면 자기가 새 왕조를 개창했을지. 어쨌거나 헝가리는 [[나치 독일]]에 붙었다가 [[소련]]에게 밟혔고[* 호르티는 중간에 배신을 때리려다 실패하여 유폐되었고 이후 망명해서 객사했다.] 이후 냉전 시기 동안 공산국가인 [[헝가리 인민 공화국]]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