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페이 (문단 편집) === 칸토팝의 여왕 === 1993년 2월 『執迷不悔』을 발표하는데 수록곡 '執迷不悔'는 왕페이가 처음으로 작사하고 최초로 북경어로 부른 곡으로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고 하고 싶은 행동을 하겠다는 내용의 가사다. 앨범에는 북경어와 광동어 버전 2개가 모두 실렸으며 홍콩에서 활동은 광동어로 하였다. 북경어 가사는 왕페이가 썼지만 광둥어 가사는 陳少琪가 작사했다. 이어 9월에 발표한 『十萬個為什麼?』의 수록곡 '冷戰'이 많은 사랑을 받으며 2년 연속 [[경가금곡]]에 뽑혔고 93년 한해에만 4개의 드라마를 출연하면서 바쁜 일년을 보냈다. 1994년 4월 기존 광동어 노래들을 보통화로 부른 '''첫 보통화 앨범 『迷』'''을 발매하며 대만에 진출한다. 『迷』는 대만에서 80만장이 팔리며 히트했고 2009년 '대만 대중가요 명반 200(台灣流行音樂200最佳專輯)'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6월 29일 '''왕페이 커리어의 분기점이 되는 앨범 『胡思亂想』'''을 발매한다. 이때부터 王菲라는 본명을 밝히면서, 본격적으로 얼터너티브 팝/록으로 노선을 변경했고, 현재까지도 공동작업하는 임석(林夕)과 C.Y. Kong 등 뮤지션과 공동작업을 시작했으며, 중국 대륙 음악계와 적극 교류를 했다. 그 결과 칸토팝의 틀에 갇힌 홍콩 대중음악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동시에 중국 본토에는 한발자국 앞선 새로운 음악을 들려주었다. ||[[파일:faye_wong_1994.jpg|width=100%]]|| || 영화 《[[중경삼림]]》에서의 왕페이 (1994) || 7월에는 주연을 맡은 '''《[[중경삼림]]》'''이 개봉했다. 왕페이는 홍콩 연예계 시스템상 연기를 하긴 했지만 연기하는 것을 좋아하진 않았는데, 매우 인상깊게 본 《[[아비정전]]》의 [[왕가위]] 감독의 캐스팅 제의는 흔쾌히 수락했고 주제곡 '''몽중인(夢中人)'''도 불렀다. 『胡思亂想』의 수록곡으로 [[크랜베리스]]의 Dreams을 번안한 노래로 보통화 버전 제목은 '掙脫'이다. 몽중인이 워낙 히트해서 아시아권에서는 원곡보다 몽중인이 더 인지도가 높다. 《중경삼림》이 명작에 반열에 오르고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왕페이의 국제적 인지도 역시 높아졌고, 한국에서도 90년대 중반 중경삼림 붐이 일면서 왕페이(당시 왕정문)가 배우로 알려졌다. 《중경삼림》으로 스톡홀름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홍콩 금상장, 대만 금마장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며 영화계의 열렬한 러브콜은 받았지만 왕페이는 '한번도 나 자신을 배우로 생각해본적 없다.'고 하며 모든 캐스팅을 거절하고 음악에만 집중한다. 이후 출연한 작품들은 모두 개인적인 친분으로 출연하게된 것으로 《戀戰沖繩》는 [[장국영]], 《大城小事》는 [[여명(홍콩)|여명]], 《[[2046]]》과 《天下無雙》은 [[왕가위]]의 인연으로 출연했다. ||[[파일:faye_wong_time.jpg|width=100%]]|| || 타임지 아시아판 표지 (1996) || 쉼없이 11월에는 두번째 보통화 앨범 '''『天空』'''을, 12월에는 광동어 앨범 '''『討好自己』'''을 발매한다. 《天空》은 대만에서 20일만에 50만장, 95년까지 100만장, 현재까지 200만장이 판매되며 대히트 했다. 대만 전체인구가 약 2200만명이 대만 인구의 약 9%가 앨범을 산 것. 비평적으로는 '대만 대중가요 명반 200'으로 선정되고 중국 대중음악에서 손꼽히는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討好自己』에서 왕페이는 본격적으로 작곡에 참여했고 임석과 더불어 왕페이의 중요한 음악적 파트너인 장아동(张亚东)과 공동작업하면서 독자적인 음악세계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1995년 왕페이는 자신의 우상 [[등려군]]을 위한 헌정 앨범을 기획한다. 첨밀밀 같은 인기곡들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들을 선정해 공들여 편곡했고, 등려군 스타일의 신곡을 만들고 등려군을 초대해서 같이 듀엣을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녹음 일주일전 등려군이 [[천식]] 발작으로 급사하여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된다. 단 한번도 등려군과 만난적이 없었고 녹음 스튜디오에서 처음 만날 예정이었던 왕페이는 두고두고 아쉬워했다고. 7월 추모앨범이 되어버린 '''『菲靡靡之音』'''은 원곡을 헤치지 않으며 본인색을 잃지 않은 트리뷰트 앨범의 정석이라는 호평을 받으며 '대만 대중가요 명반 200'에 선정되었고 대만에서 50만장 이상, 홍콩에서 10만장 이상 판매되었다. 이 앨범명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중국 공산당]]은 80년대 중반까지 등려군의 노래를 靡靡之音(퇴폐적인 음악)라며 금지했었다. 菲는 왕페이의 이름이면서 非(아닐 비)와 같은 발음으로 菲靡靡之音은 1.왕페이의 등려군 노래 2.왕페이의 퇴폐적인 노래 3.퇴폐적이지 '''않은''' 노래라는 --공산당을 돌려까는-- 중의적인 앨범명이다. 현재까지도 [[위키백과]] 중국어판에는 菲靡靡之音의 뜻이 설명되었지만 [[바이두 백과]]에는 일절 언급이 없다. 그리고 12월 발매된 광동어 앨범 '''『Di-Dar』'''은 트립합, 프로그레시브 록 영향이 강해졌으며 왕페이 특유의 창법이 더하여 몽환적인 퇴폐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실험적인 음악에 맞추어 패션과 메이크업도 아방가드르해졌는데 당시 왕페이의 모든 것들은 파격 그자체로 여겨졌다. 1996년 6월 세번째 보통화 앨범이자 '''왕페이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는 『浮躁』'''를 발표했다. 『浮躁』는 왕페이의 모든 앨범들 중 가장 실험적이고 예술적이며 완성도 높다는 평가를 받는데, 서양음악을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 왕페이 식으로 풀어냈고 수록곡 절반을 가사 없이 허밍과 스캣으로만 부르는 시도를 하였다. 『浮躁』가 중화권 음악계에 일으킨 파장과 영향력은 엄청나서 각종 중국음악 명반 리스트에 들어가고, 지금도 후배 뮤지션들의 찬사를 받는 앨범이지만 상업성은 떨어져서 역대 왕페이 앨범들 중 최악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그해 10월 중국 연예인 두번째, 가수로는 최초로 [[타임(주간지)|타임지 아시아판]] 표지를 장식했다. 소개 문구는 '''THE DIVAS OF POP'''.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