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왜구 (문단 편집) == 중국사에서의 왜구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5-16세기 왜구.pn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왜구/Japan_pirate_route.jpg|width=100%]]}}}|| ||<-2><:>{{{#ddb8e2 ■}}}{{{#241e2c,#ddd ●}}} {{{-1 15-16세기경 [[왜구]]의 활동과 침입 지역}}} || ||<-2>후기 왜구라 불리는 16세기 왜구는 조선보다는 주로 중국 해안에 침입했다. 짙은 색은 [[산둥반도]], [[한반도]]가 포함된 전기 왜구의 활동 영역이고, 연한 색은 후기 왜구의 활동 영역이다. 전기는 일본의 [[남북조시대(일본)|남북조시대]], 후기는 [[센고쿠시대]]의 혼란기에 영향을 받았고, 보통 혼란기가 진정되면 왜구도 함께 진정되는 양상을 보였다. || 중국사에서의 왜구는 크게 전기 왜구와 후기 왜구의 2시기로 나뉘어진다. 전기 왜구의 경우 명나라 초기 원나라의 멸망-명나라의 등장 사이의 혼란과 공백을 틈타서 왜구가 중국의 동해안을 대대적으로 약탈하며 사람들을 살육하고 노예로 잡아갔기 때문에 중국에서도 왜구는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명나라는 건국 초부터 왜구에 대한 토벌전을 벌여야 했고, 산동에서 수만 단위의 왜구를 토벌했다. 결국 1420년 명나라 수군이 대련 부근에서 왜구를 격파하면서 정리된다. 이 시기 명나라에 침입한 왜구에 대해서는 이들이 큐슈의 대영주인 [[쇼니]] 가문[* [[대마도]]의 도주로 유명한 소씨는 이 당시에는 쇼니씨의 가신이기도 했다.]의 [[사략선|사략함대]]일 가능성이 높다는 쪽으로 연구가 진행되어 아예 이 시기의 다이묘들 중 특정인을 주시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당연하지만 이런 경우는 강력한 군장비와 정확한 지휘 계통을 갖춘, 사실상 하나의 군대로 보아도 틀리다 할 수 없는 규모였다. 심지어 배를 통해 말을 수송해서, 기병대까지 운용한 사례도 보인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m.wanhuajing.com/1_577_344.jpg|width=100%]]}}}|| 후기 왜구가 가장 큰 문제였는데, 16세기 중반부터 왜구의 약탈이 본격적으로 벌어졌으며 이때부터 약 20-30년 동안 왜구의 약탈이 극심했다. 이 때가 [[가정제]] 시기였기 때문에 '가정왜구'(嘉靖倭寇)라고도 부른다. 2017년작 중국 영화 탕구풍운(蕩寇風雲, 한국 개봉명은 [[풍운대전]])이 이 가정왜구를 소재로 한 영화. 여러 사서에서 서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후기 왜구의 규모는 오히려 전기 왜구를 능가하는 수준이었으며 아무리 적게 잡는다 해도 그 이하로는 볼 수 없었다.[* 사실 중국은 급기야 후기 왜구도 궤멸된 이후 시대인 [[청나라]] 시기에도 [[서태후]] 집권 이전까지는 계속 해적에 시달려왔고 이는 [[정일수]] 때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후술하듯 이는 근본적으로 해금령으로 인해 발생한 현상이었는데, 결국 전기 왜구의 횡포 때문에 선언한 해금령이지만 실제로는 이 해금령 때문에 해적 문제가 해결되기는 커녕 더 악화되기만 한 것이다. 이는 오히려 중국이 서구 국가들의 강압에 의해 대대적 개항을 실시한 뒤에야 해결된다. 범죄 집단에 대한 풍선 효과의 전형적인 예시라는 점에서 현대 미국에서 있었던 [[마약과의 전쟁]]과 거의 판박이다.] 후기 왜구는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가 지방 통제력을 잃고 지방의 다이묘들이 독립한 [[전국시대(일본)|전국시대]]가 되자 [[감합무역]]이 유명무실해지면서 시작되었다. 감합무역이란 조공과는 달리 외교 관계 없이 오직 무역만 허가되는 형태로써 [[황제]]의 인장이 찍힌 문서가 있어야만 가능했다. 그러나 일본이 전국시대의 대혼란을 겪으면서 명나라 황제의 인장이 찍힌 가짜 서류가 난무하는 현상이 나타나자 감합무역이 더이상 불가능했고 밀무역이 속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중국과 일본 사이를 밀무역상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겼으나 중국 해안의 방어를 뚫기 위해 자연스럽게 무장을 하게 되었고 결국 밀무역 대신 일방적인 약탈을 가하게 되는게 후기 왜구의 등장이다. 후기 왜구는 16세기 말 명나라 군대의 적극적 대응으로 소탕이 되면서 점차 잠잠해졌다. [[16세기]]의 후기 왜구는 쓰시마와 이키를 근거지로 하였으나 일부 일본학자는 구성원 중에서 7할이 중국인이고 이들이 가왜라는 주장을 하였다.[[https://n.news.naver.com/article/021/0002038484|#]] 이 주장에는 오늘날 많은 비판이 있다. 왜구왕으로 불린 [[왕직]]이 대표적인 명나라 출신인데 왕직 또한 독자적 세력이 아니라 히라도번의 다이묘인 마쓰라 다카노부의 밑에서 비호를 받으며 활동한 해적이다.[* 조선인 왜구 이야기 또한 이 가왜에 포함된다. 다만 이들은 왜구와 같이 움직였다기 보다는 독자적인 해적이나 도적들이 왜구를 사칭하고 다닌 경우가 많다는 설이 있다. 특히 제주 출신 사학자들은 제주도를 포함한 남부 해안 도서에서, 특히 먹고 살기 어려워서 뭍으로 나가서 김 캐고 미역 팔던 두모악(豆毛岳)이나 포작인(鮑作人)으로 불린 사람들이 왜와 지리적 근접성으로 교류 좀 하고 일본 옷 좀 입고 다닌 것 뿐인데 일본에서 이들을 뭉뚱그려서 왜구 취급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다고 하며, 오히려 포작인들이 왜구들만 보면 사납게 공격해서 왜구들이 피해 다녔다는 주장도 있다.([[http://www.je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02409|링크]])]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 우리도 아는 명나라의 [[해금령]] 때문이다. 명나라의 해안 지방에서 거주하던 상인 집단이 자신들이 먹고 살 길이 완전히 막혀버리자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나 일본 등의 섬으로 이주하여 살 길을 찾았으나, 명나라가 해금령을 실시한 이상 상거래가 가능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무역루트인 명나라 항구를 이용할 방도가 없었고, 결국 도자기나 비단 등을 목표로 약탈 및 해적질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이익을 취하며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으나 1557년에 명나라군이 토벌하러 왔을때 저항하다 패하고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왕직]]의 죽음으로 왜구는 내부 분열을 맞게 된다. 덧붙여서 일본 사학계에서 가왜(假倭)에 대해서 활발하게 연구하는 것은 이 가왜를 과대포장해서 왜구와 일본과의 연결고리를 약하게 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는게 아니냐는 비판이 많다. 실제로 이런 주장 즉 왜구들은 주로 고려인,조선인,중국인이지 일본인이 아닌 가왜(假倭)라는 주장은 일제시대 조선사 편수회에 참여해 황국사관을 전파하던 '나카무라 히데다카'라는 일본인 사학자가 최초로 한 주장이기도 하다. 남조 정부가 왜구를 운영했다는 사실은 매우 큰 흠결이기에 왜구는 다민족 연합체로서 정부와는 무관하다는 결론으로 이끌어내려는 의도라는 것. 남경을 공격한 왜구들도 있는데, 이들은 약탈보다 전투에만 관심[* 이들은 사무라이 정신으로 보이기는 하나 정확한 이유는 몰라도 약탈이나 정복 및 현지인 징병도 거의 하지 않고 군인들만 죽이고 다녔기 때문에 점점 밀리게 되었다.]을 보이는 등 명실록에서도 평민인 중국인처럼 보기 어려운 면도 있었다. 전체 병력은 수천 명 규모[* 물론 중간에 합류한 왜구일 수도 있다.]이긴 했으나 소수로도 덤벼서 명의 관군과 소수 민족 병력을 학살하기도 했다[* 명세종실록(明世宗实录)에 의하면, 명나라 군사들이 쏜 화살을 왜구들이 하나하나 손으로 직접 다 잡아내어(!) 명나라 군사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경악하다가 왜구들의 공격을 받아 궤멸당했다는 [[무협지]] 같은 이야기도 실려 있다(...)[[https://www.instiz.net/pt/6009168?frompc=1|#]]]. 명나라 시기의 왜구는 명나라 말기의 명장인 총병 [[척계광]]의 활약에 의해 1567년의 전투를 마지막으로 소탕된 것으로 간주된다. 척계광은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후에 병법서인 "[[기효신서]]"를 집필하는데, 왜군을 상대하기 위해 개발된 [[원앙진]]과 [[당파(무기)|당파]]에 대한 언급이 들어있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기효신서는 [[임진왜란]] 시기 조선군을 돕기 위해 파병 나온 명나라 장수들이 조선군에 전파했고 이후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기본적인 군사 교본이 되었다. 1589년 [[센고쿠 시대|전국시대]]를 종식하고 [[태합]]의 자리에 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구에 대한 전격적인 금지령을 내렸다. 물론 이 규정은 지켜지지 않아[* 태합의 자리에 올랐다고는 하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같이 히데요시를 위협할만한 세력이 남아 있었으며, 개중에는 히데요시의 세력에 반기를 드는 세력도 있었기에 전국시대가 끝난 후에도 일본 열도에서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일본 수군에 편입되어 조선을 노략질하는 데 동원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 사령관이었던 [[구키 요시타카]]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고, 에도 막부 수립 이후 다시 금했다. 또한 천주교 박해의 일환으로 [[쇄국정책]]을 펼쳤는데 이 과정에서 당연히 왜구도 혹독한 탄압 대상이 되었고,[* 왜구가 한국과 중국만 털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자국인 일본도 같이 털었다. 이들은 근본이 약탈이 목적인 해적들이고 중앙의 관병이 아니었다. 설사 지방세력의 사략선이라 할지라도 일본의 정부군이 아니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실 제일 먼저 털리는것은 본국인 일본이었다. 그리고 특히 혼란스러운 전국시대에는 절정에 달해서 일본 내의 해상 무역이 위험할 정도였다. 그래서 치안 유지와 안정된 무역을 위해 막부로서는 왜구를 반드시 없애야만 했다. 사실 한국에서도 신라의 신라구와 조선의 수적(水賊)이 같은 한민족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으니, 왜구가 같은 일본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