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왜구 (문단 편집) == 왜구와 서양의 충돌 == 15세기 이후 왜구들 중에는 중국인도 상당수 끼어 있었다.[* 비슷한 사례로 중세기 지중해를 휩쓸었던 북아프리카 [[바르바리 해적]]들 중에도 유대인이나 유럽 출신들이 꽤 있었다. 다만 바르바리 해적이 여러 민족들로 이루어진 것과 왜구에 중국인이나 조선인도 많았던 것의 차이는 크게 두 가지인데, 일단 바르바리 해적이라 할 때 바르바리(Barbary)는 베르베르(Berber)인에서 온 말이지만 베르베르인을 가리키기보다는 북서부 아프리카 해안지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쓰인 반면, 왜구라고 할 때의 왜는 일본이라는 국가를 직접 가리킨다. 또한 왜구는 진왜든 가왜든 말 그대로 범죄자 취급이었던 반면, 바르바리 해적들은 해적이라고 직업을 대고 다녀도 자국 정부에 체포될 일이 전혀 없었으며 이름이 널리 알려지면 아예 영웅으로 대접받기까지 했다. 그래서 바르바리 해적은 서양 상선 상대로 약탈을 편하게 했을지언정 무슬림 상선 상대로는 약탈을 하지 않았지만. 왜구는 조선, 중국, 동남아 뿐만 아니라 자국 상선까지 약탈을 해댔기 때문에 일본 본토의 막부에게도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이들은 왜구인 척하면서 중국 해안가를 노략질하곤 했으며 이러한 왜구들을 가왜(假倭)라고 했다. 어차피 동북아에서 해적=왜구였으니 이들을 왜구라고 불러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서양 세력의 진출 뒤에는 동남아 지역에서 흘러들어온 일부 서양인들도 왜구로 활동했다고 한다. 동남아 무역에 종사하고 있던 [[네덜란드]] 상선이나 심지어 '''영국 해적(!)'''을 털려다가 역관광 당하기도 했다. [[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038&num=74915|1602년 영국해적 vs 왜구의 싸움. 승자는?]] 왜구는 스페인, 영국, 네덜란드 상선을 자주 공격했으나 정규군도 아닌 선원들에게 번번히 역관광을 당하기 일쑤였다. 심지어 '''60명의 스페인 병사와 1,000명의 왜구가 싸워 왜구가 패한''' '''카가얀 전투'''[* 국내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https://en.wikipedia.org/wiki/1582_Cagayan_battles|영어 위키백과의 해당 문서]] 참조.]와 같은 사례도 있을 지경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hF3cIDichio|카가얀 전투-유럽 군대와 사무라이 최초의 격돌]],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ttwar&no=1620133&search_head=70&page=1|의외로 서로 맞다이 떠본 사이]] 또 중국 해적 [[리마홍]]과 손잡고 마닐라를 정복하려다가 실패한 [[마닐라 전투(1574년)]]도 있다. 왜구는 동아시아 정규군과 싸워 높은 교환비로 이길 정도로 위협적이었지만[* 척계광 이전 왜구는 명나라의 남경을 위협할 정도로 강성했다. 이때 명군의 졸전이 얼마나 심했냐면, 겨우 '''100명'''의 왜구에게 '''10,000명'''의 정규군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양학당할 지경이었다.] 유럽의 화력과 기술력 앞에서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했다.[* 동시대 유럽에게도 위협적이었던 [[바르바리 해적]]과 비교하면 왜구의 무장이나 훈련도는 비참한 수준이다.] 이는 필리핀의 스페인 총독들이 명나라 정벌 계획을 펠리페 2세에게 지속적으로 건의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런 왜구 따위에게 중국이 초토화되는 것을 한심하게 여겼고 중국인들의 배를 임검해보니 무장수준이나 화약 무기의 수준이 형편없었기 때문이었다.[[https://gall.dcinside.com/war/494452|#]] 또한 1610년에 있었던 '''노사 세뇨라 다 그라사(Nossa Senhora da Graca) 사건'''에서는 포르투갈 상선이 일본 막부측에 매우 큰 피해를 입히고 자폭했다. 이 때 '''막부측이 동원한 병력 수는 무려 1200명'''이었는데도 제대로 승기를 잡지 못해서[* 막부측이 동원한 일본군은 거의 전부 보트른 타고 달라붙다가 포르투갈 상선인 노사 세뇨라 다 그라사 호의 사격과 척탄에 대부분 격퇴됐고, 전투가 절정에 달했을 때 소수 일본군이 등선에 성공했지만 곧바로 격퇴되었다.(The combat now reached its height. A few Japanese succeeded in boarding the carrack, but they were either cut down forthwith or forced leap into the sea.)] 백병전도 제대로 못해보고 계속 포르투갈 선원들에게 당하던 중 일본 대형선에 설치된 탑에서 발사한 총탄에 한 선원이 들고 있던 수류탄이 깨지면서 배에 화재가 발생했고 그 뒤에야 전투가 겨우 종료되었다고 한다.[[https://cafe.daum.net/historywar/Nwp/3067|#]]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