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왜구 (문단 편집) === 남북국시대 === 나당전쟁이 끝난 681년 [[신라]] [[문무왕|문무대왕]]은 죽을 때 자신을 화장해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왜구를 막겠다고 유언을 남긴다. 이 유언에 따라 세운 무덤이 [[문무대왕릉]]이다. 성덕왕 21년(722년) 10월에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모벌군[* 현 지명 경주시 외동읍.]에 관문성을 쌓았다. 이 관문성은 663년에 축조된 부산성과 673년 9월에 축조한 북형산성과 함께 경주 쪽으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인 영일만과 울산만에 상륙하는 왜적을 방어할 목적으로 쌓여졌다. >“왜의 여군(女君) 원정(元正) 6년 경신(庚申)(서기 720년, 성덕왕 19년)에 신라가 서쪽 변방을 쳤다.”하였다. -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성덕왕 21년에도 신라가 왜 원정을 나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덕왕(聖德王) 30년,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하였는데,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깨뜨렸다. (日本國兵船三百?,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신라가 통일하기 전 경상도의 소국일 때는 그렇게 뻔질나게 쳐들어왔지만 훨씬 커져버린 [[통일신라]]의 정세가 안정된 뒤에는 침략이 줄었다. 신라가 경주 일대 방어망을 꾸준히 강화했기도 하고, 이 때쯤 되면 일본도 [[나라 시대]]~[[헤이안 시대]]로 안정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연안의 해적을 관리할 여력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이 있었지만 [[발해]]가 협조하지 않아서 흐지부지되었다. 오히려 신라 말 혼란기에는 [[신라구]]가 큐슈를 탈탈 털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