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왜구 (문단 편집) === 고려 시대 === 14~15세기에 쓰시마와 이키, 마쯔우라 및 큐슈 일대를 근거지로 하는 왜구들이다. 이들은 [[사무라이]] 세력이었으나 전란으로 근거지를 잃고 결국 인근의 유력한 다이묘들에게 [[사략선]]으로나마 몸을 의탁, 남조 정부가 북조와의 전쟁에서 군량을 동원하기 위해 1350년 사략함대를 파견하기 시작함으로써 대대적인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일어났다.[* 1221년 [[조큐의 난]]에서 막부군에 참패한 공가 무사들이 토지를 [[가마쿠라 막부]]에 몰수당한것 때문에 이때부터 서서히 세력이 확장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당시의 왜구는 흔히 생각되는 이미지와 같이 단순히 무법스런 해적 집단과는 다르게 다이묘들의 사략함대였고, 이에 따라서 당시 [[고려]]의 정치 상황에 대한 평가가 180도 달라질 수 있다. 가령 기존에는 [[공민왕]]과 같은 경우 겉으로는 소위 "개혁 군주"를 표방하면서도 정작 나라 꼬라지는 해적들한테나 털릴 정도로 엉망이었다는 부정적 평가가 있기도 했으나, 왜구들이 다이묘들의 사략함대에 가까운 것이 밝혀진 현재 와서는 어느 정도 참작할 여지가 생겼다. 때문에 이는 당시 고려가 이웃국가인 일본의 정치적 혼란에 휘말린 것이며 이는 국왕 개인이 딱히 사전에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오히려 왜구들이 한반도에 침입했다는 사실보다는, 결국에는 왜구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에 더 높은 비중을 두어 평가를 재고할 수 있다. || [youtube(fvMAiSam-2s)] || || [[토크멘터리 전쟁사]] - 111부 동북아시아의 적, 왜구의 등장 || 왜구들의 활동 영역은 대개 한국과 중국 등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본 본토도 그들의 활동 영역 중 하나였다.[* 사실 도적들의 특성상 털어먹을 게 있다면 자국이든 외국이든 가리지 않는다. 도적들이 해외로 침범하는 경우는 자국의 경제가 파탄상태라 털어먹을게 없어서 해외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왜구들이 한반도나 중국으로 침범할 당시 일본열도 내부는 이미 다이묘들간의 전쟁과 사방팔방 도적들이 활개치고 다녀 혼란에 빠지던 상황이었다.] 사극 등 현대 매체들의 경우 왜구들을 야만인 집단인양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올바른 묘사로 보기 힘들며 이들은 사실상 당시 일본 열도에 퍼져 있던 [[다이묘]]들의 [[사략선|사략함대]]로 보는 게 더 현실에 가깝다. 이들은 막부에 소속된 정규군인 수군에게까지 통행세를 받아낼 정도였으니 규슈에서 수입한 조선이나 명나라의 물건들이 교토를 넘어 동쪽으로 갈수록 물류비가 더해져 값이 몇 배나 뛰었다. 또한 일본과 무역하던 네덜란드나 [[포르투갈]], [[에스파냐]] 상선들을 공격하기도 하였으며,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같은 동남아에 진출하기도 했다.[* 사실 굳이 왜구가 아니라도, 일본의 동남아시아 진출은 일본 역사에서 꽤나 유래가 깊다.] 한·중 양국의 역대 왕조가 외교 사절을 보내서 왜구의 약탈 행위를 중단시키라고 수도 없이 일본의 쇼군에게 요구했고 일본의 쇼군도 이 해적 떼를 토벌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문제는 당시 일본에서 막부가 제대로 기능했던 역사 자체가 매우 짧았고,[* 사실 일본은 에도시대에 와서야 막부의 영향력이 지방세력에까지 제대로 미치기 시작했다. 오다 노부나가가 전국을 통일했다고는 하나 이내 [[혼노지의 변]]으로 죽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조선침략과 대륙진출이라는 망상]]에 불타 무리해서 전쟁을 준비하느라 일본 본토를 제대로 마무리 짓지도 않은 채 전쟁을 일으켰다가 망했다. 결정적으로, 신라의 사심관제도처럼 중앙정부가 지방세력을 감시하고 약화시키기 위한 참근교대(参勤交代)와 같은 제도가 에도시대에 와서야 나타났다. 즉, 중앙정부가 지방세력을 완벽하게 장악하려는 시도가 에도시대 즈음 되어서야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애당초 막부라는 것 자체가 봉건제의 토대에 있는 마당에 이러한 요구가 완전히 제대로 지켜지긴 힘들었다.[* 일본의 봉건제는 중원 제국의 봉건제보다는 유럽 중세의 봉건제와 유사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막부는 사실상 수많은 번국들을 대표하는 대표자에 불과했던 경우가 많았고, 쌍무적 계약관계의 형태로 맺어진 막부와 다이묘 사이는 중앙 정부가 강력하게 기능했던 중국이나 조선에 비해서 그 관계가 느슨했다. 또한 막부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 영향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일본정치를보면 현지사보다 지역구 국회의원들이 힘이 있는것을 보면 쇼군은 내각총리 부쇼군은 부총리 다이로와 간레이 싯켄을 내각관방장관과 다이묘들을 내각 대신들과 [[지역구]] [[국회의원]]이나 도지사와 부지사로 비유할 수 있고 현지사는 고쿠시정도로 볼수있다.] 하지만 일각의 오해와는 달리 막부가 완전히 손놓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왜구가 최악으로 극심했던 1350~80년대 즈음은 그래도 무로마치 막부가 어느 정도는 기능하고 있었을 때였고, 막부의 통제가 제대로 먹히지 않는 큐슈 및 쓰시마, 이키를 비롯한 섬지대 세력가들은 막부 입장에서도 적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가능하면 막부는 이들에 대한 공세를 멈추진 않았다. 다만 이 과정에서 막부 진압군 혹은 막부가 후원하는 외래 호족에게 털린 이 일대 호족들은 더욱 더 열심히 고려를 털긴 했지만.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57|관련 글]] 고려-조선과 명나라는 현대 한국인의 생각보다 정세를 꽤 정확히 파악했는데, 일본 본토 세력을 일반적인 '왜'와는 구별해서 잘 이해하고 있었고, 조선은 이들을 주로 '삼도'란 명칭으로 통틀어 언급했다. 한편 우습게도 일본에서는 이런 왜구 짓을 하며 해상 경력을 쌓아서 등용되어 수군 간부직을 차지한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시마 일대의 해적 출신으로 [[오다 노부나가]] 휘하에서 수군장을 맡은 [[구키 요시타카]]와 [[세토내해]]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해적으로 [[이츠쿠시마 전투]] 이후 모리 가문 아래서 수군으로 활약한 [[무라카미 타케요시]], [[구루지마 미치유키]], [[구루지마 미치후사]]를 들 수 있다.] 물론 정반대로 왜구 토벌을 벌여 이름을 떨친 일본 수군 간부들도 있었지만. || [youtube(cjPaCUTKh2Y)] || || [[토크멘터리 전쟁사]] -112부 왜구를 막자, 고려의 반격 || [[파일:external/www.geojenews.co.kr/33261_30380_5115.jpg]] 고려시대 왜구들이 특히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부터였는데, 당대 한반도 해안 지역은 동서남을 막론하고 거의 대부분이 약탈 대상이었다. 조운선을 습격해 조세를 털어가고, 육지에 상륙해 도시와 마을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살육하며 노예로 잡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심지어는 해안가 근처가 아닌 충주, 청주, 단양같은 완전히 내륙에 있는 곳도 왜구에게 털린 기록이 있었을 정도로 상황이 매우 좋지 못했다. 약탈이 극에 달했을 때는 관료들의 녹봉도 못줬을 정도. 그래서 이러한 왜구들을 토벌하기 위해 고려군은 지속적으로 전투를 치렀으나 원나라 간섭기를 거치며 사실상 무장 해제 상태에 놓였던 고려군으로서는 대응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고려 말부터 시작된 왜구는 이미 해적을 넘어서 갑주를 갖추고 정확한 지휘 계통을 갖춘 군대 수준이었다. 왜구의 수장인 [[아기발도]] 항목을 보면 전신갑주로 무장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 정도의 무장을 갖출 정도면 사실상 정규군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다.[* 심지어 고려사를 보면, 고려를 침입한 왜구들 중에서는 무려 사람과 말이 모두 갑옷을 입은 철기, 즉 중무장 기병 부대까지도 있었다! 물론 14세기 일본에서는 중무장 기병들이 많이 활동을 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 일본 무사들은 쇠사슬로 만든 마갑을 씌운 말에 올라타서 칼과 창을 쥐고 적을 향해 돌격하는 백병전이 주특기였다. [[https://www.fmkorea.com/985804864|출처]] 보병이 주력이었던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군과 달리 아직 기병이 건재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왜구를 토벌하려다가 오히려 왜구한테 고려군이 역으로 참패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9115229ccae8d33e516d9cf52f3aed90845f6333fab86820bf84e73e16fcee1d.jpg|width=100%]]}}}||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고려 말 극심한 왜구의 활동은 사실상 국력이 침체된 고려의 해군력을 강하게 만들었다. 왜구가 5백여 척을 몰고와 고려를 습격하고 약탈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지만 [[최무선]]이 화포를 자체 개발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함포 테크를 완성하여 [[진포대첩]]으로 왜선 500여 척을 박살내는데 성공했다. 원래 고려 시대에는 수군 조직으로 선병도부서라는 관청이 있었다. 동북 양계에 2개씩, 그리고 전라, 경상, 양광도를 아울러 관장한 동남해도부서로 나눠 해역경비를 맡았다. 하지만 무신정권기와 원 간섭기를 거치면서 이름만 남아 사실상 제대로 된 수군이 사라지게 되는데 얼마나 심각한 정도였는지 충정왕 당시 왜구가 강화도와 한강 하류를 점거하고 개경으로 가는 조운선을 싹쓸이했을 때 130여척의 배를 끌고 왔는데 당시 고려군은 100여척의 함선밖에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 함선의 규모에서는 조금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일본에서 고려로 넘어올 정도의 배라면 정규군의 배와 그렇게 큰 차이는 보이지 않았을 것을 생각해보면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대규모의 왜구를 겪으면서 고려도 대처를 하려고 했지만 1358년에 이번에는 400척의 왜구가 몰려와 각산이라는 곳에 정박해있는 고려의 함선 300척을 불태우고 가버리는 바람에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왜구는 육지에서 막자는 육방론같은 이상한 전술이 나오는 단계까지 가버렸을 정도였다. 만약 고려에 제대로 된 수군이 있었다면 괜히 육지까지 올라와서 왜구가 설치는 걸 보느니 처음부터 바다에서 때려잡았을 것이다. [[최영]]이 경상도부터 충청도까지의 전 해안선을 아우를 정도의 해군을 만들어야한다고 하면서 2,000여 척의 수군 증강 계획을 세웠으나, 무리한 인력 징발과 당시에는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하기도 했고 우선 수군으로 왜구를 이긴 전력이 없다보니 배를 타면 죽는다는 인식이 있었던 터라 백성들의 원성을 사 실패해 왜구가 강화도까지 들어와서 설치는데도 제대로 몰아내질 못했다. 해전에서 고려가 절대적인 열세에 있던 상황을 뒤집은 것이 바로 전술한 최무선의 화포 테크에 이은 진포해전이고, 그 다음이 이희와 정지의 수군 정예화 계획에 힘입은 관음포 전투.[* 물론 2000척을 만들어 전군 수군화를 주창한 최영은 이 계획을 썩 좋게 보지 않았다.] 이 시점에 이르러서 고려-조선의 수군은 본격적으로 왜구를 압도하기 시작한다.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이 [[황산대첩]]에서 대승을 거두고 이후 박위의 1차 대마도 정벌이 있었다.[* 덤으로 왜구 수천명 포로를 상상 이상으로 잔인한 여진족에게 넘겨서 찢어발겨 죽여버렸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고려 말 왜구의 침입]] 항목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