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나 (문단 편집) == 해석 == >요나는 잔뜩 화가 나서 퉁명스럽게 야훼께 기도했다. "야훼님, 제가 집을 떠나기 전에 이렇게 되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는 다르싯으로 도망치려 했던 것입니다. 저는 다 알고 있었습니다. 야훼께서 애처롭고 불쌍한 것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시고 좀처럼 화를 내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으시어, 악을 보고 벌하려 하시다가도 금방 뉘우치시는 분인 줄 어찌 몰랐겠습니까? 그러니 야훼님, 당장 이 목숨을 거두어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요나 4장 1~3절(공동번역성서) 이 책의 특이한 점은, 주인공인 요나가 순수 [[유대인]] 혈통의 예언자면서도 야훼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이 말을 안 들은 것뿐이지, 야훼를 믿었다는 점. 그래서 더더욱 니네베에 가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이다. 요나의 심정은 '나는 니네베가 불바다가 되는 것을 보고 싶지만, 야훼는 그럴 분이 아니시고 그들을 회개시키실 것을 믿기 때문에, 차라리 도망가 버리겠다!'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일이 벌어지자 '이제 야훼의 자비로움을 알았으니 차라리 날 죽여주십시오'라고 한 걸 보면, 하느님의 능력과 성품을 오히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태도를 보인 거라는 걸 알 수 있다. 이토록 주와 소통하며 그 성품을 아는 면과 바다가 흉해진 것이 자신의 잘못에 대한 징계인 야훼의 능력인 것을 인지하고 희생하는 부분은 선지자스러운 모습을 보이면서도 동시에 아무리 그래도 조국과 민족을 괴롭힌 원수 국가가 회개하고 용서받는 꼴은 못 보겠다, 이놈들 심판받는 걸 봐야겠다 하는 인간적인 한계를 보여주는 재미있는 인물이다. 게다가 자신이 불순종해봐야 좋은 꼴은 못 볼 거라는 점이나 야훼의 권능을 이해하면서도 땡깡을 부리거나 도리어 제가 열이 받아서 죽어도 정당합니다 하고 화를 내고 따지는 등, 한편으론 그래도 자비로운 야훼신데 날 어떻게야 하겠어? 같은 심리도 은근히 보인다.~~[[광야의 유혹|??: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지만 이런 요나에게도 화를 내거나 벌을 더 내리지 않고 타이르는 모습이 나온다. 성경에 따르면 예로보암 2세는 [[예후]]왕의 증손자로 북이스라엘의 숙적 [[아람]]을 크게 쳐부숴 국가를 중흥시켰으나,[* 북이스라엘은 오므리 왕조에서 예후 왕조로 왕조교체가 이루어지는 와중 국경 수비가 허술해진 바람에 땅을 크게 잃었으나 여로보암 2세는 이를 모두 회복하여 결과적으로 여로보암 1세 시절의 영역을 거의 되찾았다. 사실 이스라엘의 중흥은 이미 여로보암 2세의 아버지인 요아스 대부터 이루어지고 있긴 했다. 이 때에도 아람을 상대로 3번 이겨서 많은 영토를 되찾기도 했다.] [[호세아]] 선지자가 이 시기에 활동하며 경고한 것처럼 지배층도 백성들도 타락의 정점을 찍고 있던 시기이다. 어쩌면 요나는 자기 나라와 민족은 타락의 정점을 찍고 있는데 적대 세력인 아시리아가 회개한 게 아니꼬웠을지도 모른다.[* 다만 호세아와 요나의 활동기가 꼭 겹친다는 보장은 없다. 호세아는 여로보암 2세 시기에서 시작해 20년간 활동했지만 그가 활동을 하기 시작한 년도는 여로보암 2세 재위 말엽이기 때문. 심지어 이 20년간 온갖 막장극이 벌어진다.] 그리고 그와 대조적으로 요나와 함께 타르시스행 배를 탔던 외국인들이나 니네베 사람들이 더 야훼를 숭배하는 모습들과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아이러니. 특히 그 외국인들이 요나에게 '''"너는 왜 네가 믿는 신한테 기도하지 않느냐?"'''라고 던진 질문은, 비단 [[유대교]]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믿는 모든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한 번 이상 꼭 겪는 패러독스 중의 하나다. 열린 결말 역시 이 책의 특징. 맨 마지막의 저 한마디만 던져 놓고 아무런 마무리도 없이 그냥 모든 이야기가 끝나 버리는 결말인데, 이런 결말은 성경 전체에서 서사 구조를 지닌 책 중에서는 이 책이 유일하다.[* 역사 기록에 중점을 둔 책들이나 각종 [[법]]을 다루고 있는 책 등을 제외한 것.] 즉, 책의 주인공에게 뭔가 명예 회복을 시켜 주거나 하는 게 전혀 없다는 점이다. 사실 이 책에 등장하는 내용은 역사적, 과학적 사실이라기보다는 문학적인 스토리에 가깝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학자들은 외국인이나 다른 민족들에게 배타적으로 향하던 후기 [[유대교]]의 흐름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교훈 설화'의 형태로 요나를 썼을 것으로 보고 있다. 대체로 당시 에즈라서로 대표되는 흐름에 정면으로 반발하는 또 다른 흐름을 보여주는 책이라고 보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다. 애초에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가 갈라져 나온 이유 중의 하나로 다른 민족에 대한 배타성에 반발한 것도 있었다[* 유대인들의 소위 [[선민사상]]과 구원은 오직 유대인들에게만이란 신념 때문에 타민족(유대인들의 입장에선 이방인)에게 하느님의 가르침이 전달되는것을 좋지 않게 여겼다. 바울로도 예수의 복음을 거부하고 반대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그들이 거부한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겠다고 선언하자 유대인들의 엄청난 반발에 직면해야 했다.]. 성서학계의 중론은 이 이야기를 픽션으로 보고 있다. 어휘나 문체나 신학적 특징으로 보아 요나 당대의 기록은 절대 아니며, 요나의 생애는 물론 아시리아에서 일어난 사건도 다른 문헌과 교차 검증되는 부분도 없기 때문. 저자는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 일부러 요나서가 쓰여질 당시에는 한참 전에 멸망한 아시리아를 무대로 삼아 우화를 썼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성이 아닌 신학적으로 볼 때에, 요나는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유대 민족의 신이었던 [[야훼|하느님]]이 다른 민족의 신이 될 수 있다는 암시를 던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요나에서 처음 나온 것은 아니라는 반박도 있다. [[탈출기]]를 보면 야훼가 스스로 가난한 자들의 신을 칭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부터 민족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으로 보는 것. 애초에 히브리인이라는 단어가 어원적으로 떠돌이를 뜻하지 딱히 특정 민족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었다. 또한 애초부터 이스라엘을 따로 선별한 이유가 이들이 하느님을 잘 믿고 따를 때 받게 될 축복으로 인해 열방의 다른 민족이 하느님을 보고 돌아올 수 있도록 다리가 되는 제사장 나라를 삼고자 함이었다. 즉 이방인들 역시 구원의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뻗어가는 것이므로 이들이 축복의 근원지가 된다는 점에선 확실히 은총을 입은 민족이었지만, 여러번 기회를 주었음에도 거듭된 실패로 인해 열방에 야훼를 전하긴 커녕 자신들에 대한 징계로 온갖 열방에게 침략당하고 얻어터지고 능욕당하며 그 이름을 더럽히기 일쑤였고, 결국 그러한 특권을 상실한 것이라는 것.] 다른 신을 믿던 뱃사람들이[* '각자 자신들의 신을 향해 기도했다'라는 문구를 통해 뱃사람들은 각자 믿고 있던 신들이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뱃사람이 요나를 갈군 것도 어느 신이라도 좋으니 좀 살려달라 청해라는 뜻이었고. 어찌 보면 그런 태도였기 때문에 간단히 개종한 것일 수도 있다.] 폭풍우가 그치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여 개종하는 것, 아시리아인들이 회개하여 용서를 받은 장면은 다른 민족 역시 [[야훼]]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