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담 (문단 편집) === 청주 정복 === <원소전>에 주석으로 인용된 《구주춘추》에서는 원담이 본디 도독이었을 뿐 자사는 되지 못했으나 훗날 [[조조]]가 자사로 천거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원담은 청주로 보임할 당시에는 자사가 아니라 도독의 직함으로 불려졌고 아마 196년 무렵 [[헌제]]를 옹립한 조조가 정식으로 원담을 청주자사로 천거한 것으로 보인다. 본디 원소는 청주자사 [[초화]]가 죽자 후임 청주자사로 자신과 가까웠던 [[장홍(삼국지)|장홍]]을 보냈고 장홍이 2년에 걸쳐 청주를 다스리며 도적떼들이 모두 도망갔기에 원소가 그 능력에 감탄하면서 동군태수로 전임시켰다고 장홍전에서는 적고 있으나, 후한서 공손찬전에서는 평원국을 접수한 공손찬이 청주자사로 삼았던 [[전해]]를 보내 제(齊)국 일대를 점령시키자 원소가 군세를 보내 2년에 걸쳐 싸웠으나 전황이 안 좋았다가 원담이 파견되자 전해가 패한 것으로 나타나며, 구주춘추에서 이어지는 서술에 따르면 당시 청주에서 원소의 세력은 아주 미미하여 원담은 기주의 동쪽 끝 접경지역인 평원국 서부의 일부만을 점유할 뿐이었기에 장홍의 활약은 아마 청주에 교두보를 확보해 전해나 황건적의 공세를 막아내는 데 그쳤던 듯 하다. 새로 부임한 원담은 군사적인 재능이 뛰어났는지 곧 전해를 격파하고 청주에서 공손찬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으며 또한 북해 태수 [[공융]][* 참고로 공융이 북해에서 축출된 해는 건안 원년(196년), 사망한 해는 13년(208년)이다.]을 격파해 그 세력을 멸망시켰고, 청주에 난립하고 있던 여러 군소 군벌들과 황건적 잔당 무리도 성공적으로 흡수해[* 《삼국지》 <하기전>의 기록. 대체로 관직을 주어 포섭했던 것 같다.] 오랫동안 헬게이트 상태였던 청주를 통일했고, 백성들의 열렬한 추대를 받아 그 위세가 바다까지 빛났다.[* 당시 청주의 해안지역은 해적들이 극심했다. 요동에서 황제 행세를 하고 있던 [[공손도]] 또한 바다 건너로 군사를 보내 동래군 일대의 현들을 점령하고 영주(營州)라고 부르며 영주 자사를 두는 등 객기를 부린 바가 있고, 수만 명의 군사를 보내 공융에게 찝적대다가 크게 패하는 기록도 있다. 원담이 청주 전역을 제패했다면 이런 해상세력들과의 충돌은 필수적인데,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바다까지 위세가 빛났다'는 표현으로 봤을 때 해적들을 소탕하거나 본국과 떨어져 있던 요동 공손씨의 영주자사부를 치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고 보기도 한다.] 원담이 청주를 평정하는 과정에서 비중있게 남은 개별적인 전투 기록은 전무하나 193년 시점에서 기주와 바로 맞닿아 있던 서부 경계지역 일부를 점유하는 데 그쳤던 원소의 청주 내 영향력이 원담의 부임 이후 급격히 팽창하여 196년에는 동부 해안가까지 세력을 떨치며 청주 전역을 커버하게 되었다는 점과 원담이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서술에서도 보이듯 청주 평정의 과정에서 원담은 연승가도를 달리며 상당한 군사적 명성을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위세는 곧 썰물처럼 빠져나갔으며, 원담의 전성기는 여기까지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