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세훈(1951) (문단 편집) === 관료 시절 === 원세훈 사무관은 총무처 - 부산시청 - 강원도청을 거쳤고 1978년 이래로 [[서울특별시청]]에서 계속 일하다가[* [[전국동시지방선거|기초, 광역단체장 직선제]] 실시 전 마지막 관선 [[강남구청장]]을 지냈다.], 2002년 상수도사업본부장 재임 도중에 [[이명박]]이 [[서울특별시장]]으로 당선되고 그 직후 서울시청 경영기획실장을 거쳐, 2003년 10월 30일 차관급[* 서울시를 제외한 모든 광역자치단체의 장들은 차관급인데 반해, 서울특별시장은 유일한 장관급이라 서울시의 직책은 다른 광역자치단체보다 시장/부시장의 급수가 1급씩 더 높다.]인 [[서울특별시 부시장|서울특별시 행정1부시장]]이 되었다. 행정1부시장 시절 이명박 시장이 [[청계천 복원사업]]과 [[중앙버스전용차로]] 도입 등 중요 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인사, 재정 등 서울시의 안살림을 꼼꼼하게 챙겨 신임을 얻었다. 그래서 2006년 6월 이명박의 시장 퇴임 때까지 임기 4년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이 때 대표적인 [[혼밥]]족이라고 불리면서 당시 [[이명박 정부]] 핵심 인사들 사이에서 [[http://shindonga.donga.com/Library/3/06/13/108340/1|별명이 '원따로' 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청렴하고 원칙주의적이던 면모는 무소불위의 국정원장이 되면서 정반대로 뒤집히니, 나쁜 의미로 자리가 사람을 만든 셈.] 그 후 2007년 초에는 [[이명박]] 예비후보 상근특보로 발탁되었다. 이명박이 [[한나라당]] 대선후보로 결정되자 이명박 대통령후보 특보가 되었다. [[제17대 대통령 선거|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2008년 2월 [[행정안전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2009년 1월 개각 후 그해 2월, 전임 [[김성호(1950)|김성호]] 원장의 뒤를 이어 [[국가정보원장]]으로 발탁되었다. 이때 야당에서는 정실인사 혹은 그의 전문성에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가 국가정보분야와 거리가 먼 지방행정분야에서 일해온 관료 출신이었기 때문. [[국가정보원장]]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중정부장-안기부장-국정원장은 군, 검찰, 경찰, 외교관 출신이 맡는 것이 일반적이다. 군, 검찰, 경찰, 외교관, 안기부 내부승진 출신이 아닌 경우는 30대 원세훈 국정원장을 포함해 20대 [[김덕]] 안기부장, 26대 [[고영구]] 국정원장, [[박지원]] 총 4명인데, 김덕 안기부장은 정치학자, 고영구 국정원장은 변호사[* 다만, 본업은 판사였고, 1981~1985년에 [[제11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력이 있다. 이후에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회장과 헌법 개혁운동을 진행하는 등 법률과 관련된 사회운동을 적극적으로 개진해, [[노무현]] 대통령이 '국정원 개혁 마무리'에 방점을 찍고 채택한 케이스. 즉 어느정도의 소양과 내부개혁이라는 정당성은 어느정도 갖춰진 인사였다.], 박지원 국정원장은 [[남북통일]]을 위해 그렇게 노력했던 [[국민의 정부]] 시절의 [[대통령비서실장]][* 정보, 치안, 국방, 외교안보의 실무전선에서 일하는 기관들의 사령관이라 보면 된다. 공식적으로 군, 검찰, 경찰, 외교관, 안기부 출신은 아니지만 저런 기관들을 통솔하는 기관이 청와대 비서실이므로 박지원은 절대 쌩초짜가 아니라 오히려 전문가 수준이다. 18~20대 국회의원 당시에도 박지원 의원과 가장 많이 소통한 기관은 국정원이며, 웬만한 내부승진 출신만큼 국정원을 잘 아는 인물이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원장에 등용된 이유가 바로 이거다.] 출신인데다 이 청와대 비서실장 이미지가 20년이 지난 지금도 남아있고 국회의원 당시에도 [[정보위원회]]에 소속되어 국정원과 활발하게 소통하여 온 인물로, 웬만한 국정원 현직자만큼 국가안보 관련 업무능력이 뛰어나다. 그런데, 원세훈 국정원장은 뜬금없게도 서울시 공무원 출신이다. 이렇게 보면 알 수 있듯이 '''역대 정보기관장 중에서 단 1일조차 법무/정보/치안/국방/외교 계통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오직 원세훈 뿐이다.''' [youtube(dTeZTbiKM4I)] 심지어 당시 여당이었던 한나라당의 [[정몽준]] 최고위원은 이제까지 해온 업무와 너무 다른 정보분야인데 잘 할 수 있을지 우려를 나타냈고 '''[[홍준표]]''' 원내대표도 일단은 동의해주겠지만 국정원장 취임하면 맨 처음부터 배운다는 자세로 할 것을 당부했다.[* 이 두 사람은 '''현역'''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이후 이들은 [[인도네시아 특사단 숙소 침입사건]]이 터지자 국정원장 책임이라며 비판을 가했다.[[http://www.ytn.co.kr/_ln/0101_201102231021504600|해당 기사]]] 약 4년 넘게 국정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이명박의 지시에 따라 국정원의 정치개입을 적극적으로 주도하고(대표적인 게 노무현에 대한 ''''[[논두렁 시계]]'''' 언론 플레이)[* 2009년 4월 [[대한민국 검찰청|검찰]]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뇌물 수수 혐의를 증명하기 위해 강도 높은 수사를 벌일 때, 국정원이 ''''논두렁 시계'''' 운운하는 언론 플레이를 하였다.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스토리 자체가 너무나 극적이고 황당했기 때문에, 이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하였고, 국민 다수가 노무현에 대해서 실망 정도가 아니라 아예 경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진실은 노무현과 그 측근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논두렁'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 국정원의 언론 플레이로 억울한 심경이 극에 달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후 어떠한 파국을 맞이했는지 생각해보면 이때의 언론 플레이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때 국정원이 언론 플레이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기밀사항이었으나 2015년 2월 25일 [[이인규(법조인)|이인규]]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대검 중수부장]]의 술자리 발언으로 결국 폭로되었고 기사화되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2250600075&code=940301|해당 기사]]] 정부정책에 비판적이면 여당이든[* 무려 '''[[친이]]계'''인 [[홍정욱]]과 [[이종구(정치인)|이종구]]마저도 각각 정부 비판과 [[한화그룹]]과의 악연을 이유로 사찰 대상에 들어갔었다.[[https://imnews.imbc.com/replay/2021/nwdesk/article/6077819_34936.html|#]]] 야당이든 사찰해왔으며, 야당과 시민단체에게 종북좌파 공세를 펼치는 등 물의를 빚었다.[* 2009년 2월~2013년 매달 국정원 부서장회의를 주관하며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등 종북좌파 단체들이 시민단체, 종교단체 등의 허울 뒤에 숨어 활발히 움직인다"고 말했다. 또 "종북세력 척결과 관련 북한과 싸우는 것보다 전교조 등 내부의 적과 싸우는 것이 더욱 어렵다" 등의 말도 했다. 이러한 국정원장의 발언은 회의 뒤 요약돼 국정원 내부 전산망의 공지사항에 '원장님 지시·강조말씀'이란 제목으로 올라갔다.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6/04/21/20160421002613.html|해당 기사]]]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했을 당시 삼성을 비롯한 여러 대기업들이 정보를 빨리 입수하여 혼란에 대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대북 기관인 국정원은 이에 대해 깜깜이어서 원장의 무능함이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2013년 2월 이명박이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퇴임할 때 함께 사퇴하는 것이 예상되었으나 국가정보원장 후임자 인선이 늦어져 계속 근무하였다. 그러나 2013년 2월부터 댓글조작 의혹이 나타나자 3월 21일 사직서를 제출하고 전격 퇴직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