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소(삼국지) (문단 편집) === 사실은 조조 쪽에서 열등감을 느낀 절친 === 익히 알려져 있듯 [[조조]]와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는데,[* 조조는 그 외에도 [[허유]]나 [[원술]]과도 어린 시절에 친구였다고 한다. 허유는 오만함 때문에 죽었고, 원술은 언급 자체가 잘 안 된다.][* 조조나 원소의 어린 시절은 아직 한나라 조정의 권위가 살아였던 시대였으므로, 중앙정계에서 세력있던 명문가 자제들의 우정+인맥정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후 한나라 조정의 권위가 땅속으로 쳐박히고 군웅할거시대가 열리면서 세력을 가진 이들 명문가 자제들이 군벌(군웅)로 등장하게 된 것.] 이 때문에 라이벌 플래그를 만드는 매체들이 많다. 대부분의 삼국지 창작물에서 원소는 어린 시절부터 일방적으로 조조에게 열폭하는 모습을 보이나, 원소에 대한 기록이나 원소 자신이 남긴 글을 보면 원소는 조조를 그다지 라이벌로 인식하지 않았다. 원소는 오히려 동탁, 원술, 공손찬을 의식했던 기록들이 많다. 이들은 원소보다 강한 군사력을 지녔거나 원소보다 높은 이름값을 가졌는데 조조는 둘 중 하나도 해당이 안 된다. '''오히려, 조조 측에서 원소를 의식했던 인상적인 기록들이 많다.''' 조조가 젊은 시절의 원소를 보며 장차 역적의 우두머리가 될 자라고 욕했다든가(황보밀 일사전), 원소의 편지 한 통에 흥분해 히스테리 증세를 보였다든가(삼국지 순욱전), 조조의 책사들이 원소를 의식하는 조조에게 양자의 재능의 차이를 비교하며 조조를 격려하는 등의 기록이 수두룩하다. 군웅할거 초반에 조조는 거의 원소에게 종속된 적도 있었고 원소의 도움을 받아 살아난 적도 있었다. 즉, 현대 삼국지에서 원소와 조조의 묘사는 정반대인 셈. 그가 본격적으로 이런 갑을 관계를 청산하게 된 것은 헌제를 받아들여 협천자를 하게 된 이후의 일이다. 훗날의 대립구도와 개혁가 조조vs수꼴 원소의 이미지 때문인지 서로를 경멸하는 관계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으나,[* 그러나 조조가 개혁가라고 하기에는 미묘한 부분이 많으며, --[[조조|?]]: "개혁가? 내가 개혁가라고 포장했던가? 나는 무너진 법을 다시 세워서 '''엄격한 법집행'''을 시행했을 뿐인데?"-- 원소는 수꼴보다는 동탁에 의해 옹립된 헌제를 인정하지 않으며, 다른 황족을 추대하려고 시도하거나 자신이 그 자리에 앉으려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는 원소는 조조를 잘 대접했다. 삼국지 원소전 첫머리부터 조조와 유년기부터의 교분이 언급되어 있고, 숙청을 밥먹듯이 벌였던 시절에도 원소는 조조를 동군태수로 삼고, 조조가 협천자로 원소의 뒤통수를 치기 전까지 원소는 조조를 꾸준히 후원했다. 조조가 통수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어린 시절부터의 우정을 가지고 잘 대해줬다는 증거. 이 점에서는 같은 세대에 속하는 두 사람 중에서 '''먼저''' 정치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것이 원소라는 점 역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얼자 출신이라는 불리함[* 물론 얼자라고는 해도 명문가 출신이라는 유리함은 가졌지만, 출세에 인맥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던 당대 상황에서 보면 어차피 중앙정계에서 출세하는 사람들은 쟁쟁한 명문가의 자제들이었고, 그들의 리그에서 원소의 입장은 비교적 불리한 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원소의 입장을 유비와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인데, 유비만 봐도 당대의 명사인 [[노식]] 아래서 공부했고 젊어서부터 [[관우]], [[장비]], [[간옹]]등 자기 패거리를 모아서 활보하다가 난리가 일어나자 이들을 이끌고 거병했으니 완전히 평민은 아니고 그 지역(고향인 탁현) 일대에서는 어느정도 행세하는 지역 유지 출신정도였다고 볼 수 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직접 돗자리와 신발을 삼아 팔 정도로 가난했지만 친척인 [[유원기]]의 도움으로 공부할 수 노식의 문하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는 것을 보면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어 자기 집은 가난했지만 가까운 일가 친족 집단은 지역 유지였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도 적지 않은 독자들이 유비를 '벼슬길 나기기도 힘든 쌩평민 출신'이라고 여기는 것은, 진짜 당대의 쌩평민들은 십만대군중 병사 1~100000번 밖에 못 하기 때문에 삼국지에 이름 있는 등장인물로 나오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네임드 등장인물들은 어차피 대부분 쟁쟁한 명문가 후손들이니 유비 정도의 출신 배경은 그중에서는 제일 밑바닥에 가까워 스펙이라 할 것도 없다는 것. 결국 나중에 유비가 황실 혈통을 잘 이용해서 명분을 얻기는 하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맨주먹에서 자기 실력으로 세력을 쌓은 뒤에 헌제 주변의 유력 군웅중 그나마 황실 혈통(황제를 보호할 인물)은 자기 뿐이라는 점을 어필함으로써 가능했던 일이다. 즉 황실 혈통으로 세력을 쌓은 것이 아니라 그 혈통을 활용할 기반을 스스로 쌓았기 때문에 배경을 활용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원소의 경우 초기조건은 유비보다 좀 더 유리했지만 그 유형은 결국 유비와 유사했다고 볼 수 있다. 초기 이력부터 수도의 유력자들과 교분을 쌓고 중앙정계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 자체는 사세삼공의 명문가인 원씨 일족의 일원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맞다. 하지만 중앙정부에서건 군벌로서건 가문의 지원과 후광은 당연히 적자에게 집중되는 것인데, 적자인 원술을 제치고 압도적인 세력을 구축한 것은 원소 자신의 역량이었던 것. 그리고 스스로의 역량으로 '원가의 대표주자'가 될만함을 입증하고 나서야 원씨 집안의 힘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에도 불구하고 조조보다 훨신 먼저 정치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고 독자적인 세력을 갖춘 것. 구체적으로 보면, 조조와 원소 모두 황제 직속군 지휘관인 [[서원팔교위]]로 뽑히면서 같은 시기에 중앙 정부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둘중에서 훨신 빨리 성장한 것은 원소로, 청류파[* [[호족]], [[사대부]]]의 아이돌격인 입지를 이용해 정치적 1인자로 자리잡은 [[하진(후한)|하진]]의 정치적 파트너로 위상을 다졌고, [[십상시의 난]]으로 하진이 암살당한 이후에는 환관 주살을 주도했으며 [[동탁]] 집권 이후에는 [[반동탁 연합]]에서 맹주의 위상까지 차지했던 것.[* 반면 조조는, 반동탁 연합 시기에는 주요 제후가 아니라 '그 외 참여자들' 그룹에 속해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두각을 통해 [[군웅할거]] 시대에는 하북에 거대한 세력[* 사실상, 당시 중국 최대의 세력]을 구축하는 데에 이른 것이다. 반면 이 시기까지 조조의 세력은 아직 무수한 군벌 중 하나 정도로, 도저히 원소의 세력을 따를 수준이 되지 못했다. 현대 정치에 비교하자면 같은 시기 첫 공천을 받아 당선된 두 청년 정치인이 2선이나 3선 의원이 된 시점 정도에서 한 사람은 아직 보통 국회의원 중 한 사람으로 [[상임위]]원장 정도를 노리고 있는데 다른 한 사람은 주요 당직을 차지하고 자기 계파까지 꾸린 채 장관이나 총리 후보, 대권주자등으로 물망에 오르고 자기 당 정권에서 주요 구성원 역할까지 담당하고 있는 격이다. 군웅할거 초기 조조를 후원하던 원소의 태도나 원소에 대한 컴플렉스에 시달리던 조조의 모습 역시 이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원소 입장에서는 어릴때부터 친구였고, 성향이나 성격도 비슷하고, 능력도 있는 조조를 '''자기 사람'''으로 여기고 후원해주는 것인데, 자기애와 자부심이 강한 조조 입장에서는 "대체 내가 원소만 못한게 뭐가 있다고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냐!" 열폭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결국 협천자를 통해 독립적인 세력 기반을 확보하고 원소를 쓰러트리기에 이른 것. 조조와 원소는 성격 상 서로 유사한 점이 많은 편이었는데[* 둘 다 자기애성 성향이 매우 강하다.] 조조와 유비가 [[아치 에너미]]로 대극을 이루면서도 서로의 능력과 성격을 간파했다면 이 둘은 동류로서 서로를 이해하고 친근함을 느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조조는 원소가 죽고 하북을 손에 넣은 뒤에 사람이 좀 맛이 가는 모습을 보이는데, 원소의 존재는 조조에게 있어 그가 가장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동기부여를 줬다고도 할 수 있다. 유비의 경우에도 마지막의 적으로서 오래전부터 인식하고 있었지만, 이미 조조가 좀 맛이 간 뒤였다.[* 원소를 의식한 측면이나 [[적벽대전]] 이후 손권을 애취급하면서 유비를 의식한 모습등을 보면 조조는 하고 다니는 행동에 비하면 다정다감하고(감정적이고), 특히 자기 인생의 최대 난관이었던 군웅할거시대의 라이벌들을 강하게 의식하는 성격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점에서 보면 조조가 의식하는 원소는 <한때 자신보다 훨씬 앞서나가던 라이벌이지만, 결국 최종적으로는 자신이 극복하고 쓰러트린 최강의 라이벌>에 가까웠을 것이며, 따라서 <자신보다 훨씬 불리한 상황에서 출발하여 훨씬 험난한 고난속을 해쳐나왔지만,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 마지막 적수가 된 라이벌>인 유비와는 다른 의미에서 조조에게 상당한 의미를 가졌으리라 추정할할 수 있다.] 조조 역시 하북을 평정한 뒤 원소의 무덤에서 장례를 지내며 곡을 한 사건을 보면 정말로 친했을 것이다.[* 원희의 처였던 [[문소황후|견씨]]를 조비와 혼인시킨 것도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 당시 조비는 부인이 없었기에 결혼을 한다면 견씨가 정처가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비는 (조앙 사후였으므로) 후계자 서열 1순위라 봐도 무방한 상태였기에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조조 사후에 세력의 주인이 될 테고, 조비와 견씨의 아들은 조비 사후에 세력을 거느리게 되는 상황이다. 실제로 조비가 후계 자리를 이었고.] 조조가 원소의 무덤에서 곡을 했던 일화는 하북 현지에서의 여론을 의식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조조 세력의 공식적인 입장은 어디까지나 조정의 수장으로서 황실을 능멸하는 역적 원소를 토벌한다는 것이었다. 즉, 이것은 자신의 세력이 내세운 정치적 명분을 조조의 개인적인 이유로 완전히 뒤엎은 행동이라 삼국시대가 종결된 이후 후대에조차 자기 말을 뒤집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조조가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무척이나 감정적인 사람이라는 것과 죽기 직전에 보인 태도를 보면 원소의 오랜 친구로서 감정이 북받쳐 올라 진심으로 슬퍼서 울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조는 죽기 전에 쓴 유촉에서 원소를 언급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원소를 미워하는 감정이 전혀 없으며, 단지 원소가 워낙 편협하고 이기적이라 같이 왕실과 조정을 돕기로 했던 맹세[* 아마 젊은 시절 [[동탁 토벌전]]을 비롯해 같이 한의 부흥을 위해 싸웠던 시절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를 어긴 것이 안타까울 뿐이라 덧붙였다. 스스로를 충신이라 자칭하는 것을 빼면 정치권력 문제 때문에 갈라지고 서로 싸우고 결국 원소의 세력과 집안을 파멸시키기도 했지만 원소에 대한 우정은 죽을 때까지 남아 있었고, 원소의 최후에 대해서도 개인적으로는 안타까움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원소가 독선적인 것은 사실이기도 하고. 이런 걸 보면 조조의 입장에서 원소는 군웅으로서 평생을 넘어서야 했던 숙적이었지만, 그걸 제외하면 정말 소중했던 친구가 맞았던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