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소(삼국지) (문단 편집) == 조조에게 원소가 지니는 비중 == >'''원소의 세력이 강했을 때는 나조차도 마음이 흔들렸다. 내가 그러했는데, 하물며 다른 이들은 어떠했겠는가?''' >---- >이문열의 삼국지 中 [[조조]][* 관도대전 이후 조조의 부하들이 원소와 내통한 상소들을 보며. 하후돈은 이들을 모두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조조는 위와 같이 말하고는 "이 일은 두 번 다시 입 밖에 꺼내지 말라." 고 엄명을 내리며 내통한 상소들을 모두 불태웠다.] 유비가 조조에게 있어 서로 대비되는 속성을 가진 가장 까다롭고 치열한 적이었다면, 원소는 소꿉친구이면서도 조조에게 있어 '''가장 강력하고 무서운 적'''이었다. 흔히들 삼국시대의 막을 열었다고 볼 수 있는 [[적벽대전]]의 유명세에 이끌리기에 쉽지만, 역사적으로는 조조와 원소가 맞붙고 조조가 천하의 주도권을 잡는 [[관도대전]] 역시 그 못지 않게 중요한 전투이며 조조 생애에 있어서 최대의 난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때는 조조조차 그에게 투항하려던 적이 있었을 정도였고, 심지어 원소는 관도대전에서 대패한 이후에도 [[넘사벽]]의 세력비를 유지하여 중국의 최강자로서 죽었다. 조조는 원소가 살아있을 때까지 싸움은커녕 수비하기도 급급한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최종보스. 삼국이 정립이 된 후에도 조조의 위나라가 다른 두 세력을 합친 것보다도 훨씬 거대할 정도의 막강한 세력을 갖추게 된 것은 모두 원소를 쓰러트리고 나서 얻은 성과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의 오해 항목에서도 나오지만, 애초에 원소는 협천자 논쟁으로 뒤통수를 맞기 이전까지는 조조를 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둘의 인연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됐고, 원소는 자신의 처지가 약소했던 시절부터 조조를 꾸준히 지원했으며, 오히려 조조 측에서 원소에 대한 경외심을 보인 기록이 많다. 그 잔인했던 조조가 원소의 무덤에서 곡을 하고 죄책감을 기록으로 남긴 것도 이런 관계 때문이었다. 삼국지 무제기에서는 '''원소의 가족'''에 관련된 서술이 거의 절반에 달하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관도대전]]은 매우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원소전보다 무제기에 실린 내용이 더 풍부하다. 조조의 일대기 자체가 '''조조 vs 원소'''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 무제기의 인물평[* 타인의 기전의 인물평에 이름을 올리는 경우는 상당히 드문 케이스다. 또 하나의 예는 유비의 인물평에 언급된 조조.]에도 유일하게 이름을 올리는 등 여러가지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훗날의 [[촉한]]과 [[오나라]] 역시 강한 세력이었으나 각각 산맥과 [[장강|강]]이라는 지형적인 장벽을 두고 오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반면 원소는 황하를 두고 허도의 바로 북쪽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조조의 생존 자체를 결정할 수 있었다. 심지어 무제기는 [[유비]]나 [[손권]]보다도 '''원소의 후계자들과의 싸움'''인 [[원상]], [[원담]]에게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고, 위서 유이열전에서는 오와 촉의 신하들은 원소 시대 기주의 병사들에 미치지 못하고, 손권과 유비 역시 원소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이 면에서 보면, 조조의 인생에서 원소는 일종의 '''최종보스''' 역할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그와는 별개로 조조가 살아가면서 죽기 전까지 언급했던 원소에 대한 말과 행동들을 보면, 단순히 쓰러트려야 하는 막강한 숙적 정도를 넘어서 정말 복잡한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조조의 일대기에 자기 열전만큼 기록이 많다는 점만 보더라도, 조조의 인생에서 적으로든 친구로든 가장 깊은 관계를 맺은 인물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