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소(삼국지) (문단 편집) === 정치적 능력 === 젊은 시절의 원소를 보기 위해 몰려든 행렬로 거리가 마비되었다는 영웅기의 기록이나, 지혜있는 선비들은 원소의 계책과 의론에 매료되었으며, 용맹한 무사들은 원소의 과감성에 목숨 바치기를 서로 다퉜다는 범엽의 평, 남녀노소를 막론한 모든 계층에서 원소를 흠모했다는 헌제춘추의 기록 등을 보면 원소는 쇼맨십에 대단히 능했고, 개인적으로도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6년상 등의 자기 학대에 가까운 고행으로 야권세력인 청류파의 [[아이돌]]로 군림했던 초반의 행적이 유교적 가치관에 얽매이는 보수적인 인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하지만, 원소의 정치력과 대의명분을 통제하는 능력은 삼국지에서도 가히 독보적이며 그와 동시에 '''누구보다 독살스러운 정치인'''이었다. 원소는 서자도 아닌 노비 어머니에서 태어난 얼자다. 그런 그가 돋보일 수 있는 것은 고행으로 유명한 6년 동안의 시묘살이다. 오늘날에도 돋보이는 선행을 한 사람이 그 가치를 인정 받듯, 위선으로 보일지라도 원소는 그 시기에 합당한 일을 한 것이다. 원소는 원봉의 얼자로 이미 죽은 원성의 가문으로 입적되었으니 사실상 고아나 다름없었으나, 양부와 적모의 6년상으로 효자를 자처했고, 동탁이 자리잡은 정부의 칙사를 살해하고 반란을 부추겨 정작 친어머니와 일족 50인을 제물로 바쳤다. 이후 20년 간의 무정부상태를 초래하며 '''사실상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후한과 친족을 멸망시켰다'''. 하지만, 원소의 이런 행보는 관이 극도로 부패하던 영제 치하의 분위기 속에서 청렴한 효자로 칭송되며 정치적 거물로 인정받았고, 동탁이 아무런 명분 없이 황제와 태후의 폐위라는 전례 없는 폭거를 저지른 상황 속에서 전국적인 호응을 받고 동정표[* 원술에게 쓴 서신에서 보이듯 스스로를 은근히 [[오운|오자서]]에 비유하면서 그 행보를 포장했다.]까지 더해졌으며 원소는 스스로의 입지를 부패한 권력에 저항하는 소위 '''애국열사''' 로서 확고히 포장했다. 또한 청류파 인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던 만큼, 영제 사후 십상시를 위시한 [[환관]] 세력들에 대한 원소의 공세는 그야말로 광기에 가까운 수준이었는데, [[영사황후 하씨|하태후]]가 [[십상시]]를 비호하는 상황에서 1.) 보정대신 하진은 직접적으로 하태후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2.) 하태후는 '''십상시의 파직을 동의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는 목적 아래 [[정원(삼국지)|정원]]을 시켜 수도의 요지인 맹진을 불살랐으며 정보를 통제해 이를 [[흑산적]]의 소행으로 위장, [[영제(후한)|영제]]와 십상시가 주도한 대 흑산적 유화정책을 탄핵했다. 동탁 등 지방의 장군들을 소집한 것은 '[[흑산적]]의 위협'이라는 음모론을 조작하고, [[계엄령]]에 가까운 공포 분위기를 유지하며 정보를 통제하는 한편 십상시의 축출이 성공한 뒤 [[동탁]] 등과 합세해 흑산적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로 불만여론을 환기시키려는 포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불행히도(?) [[하진(삼국지)|하진]]이 암살당하고 정국이 요동치면서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 훗날 [[공손찬]]이 찬표소죄상을 쓸때 이 일을 간단히 언급하며 원소를 비난한 것 외에는 의외로 비난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그러거나 말거나 원소의 지지층은 더욱 결집했으며, 원소 스스로도 십상시를 척결한 것을 자신의 주요 업적으로 선전했다. 그러나 이를 정치적으로 훌륭하다고 보긴 어렵다. '''결과적으로 이는 동탁을 불러와 이후의 난세의 문을 연 것이기 때문이다.''' 원소 입장에서는 최소한의 피해와 명분 확보로 환관 세력을 결단내려던 것이겠으나, 그를 위해 동탁과 정원으로 대표되는 지방 군벌을 불러온 것이 결국은 난세를 불렀다. 하진이 암살당한 이후 정국이 몇 차례나 [[시소]]를 탄 끝에 어쩌다보니 운 좋게 황제의 신변을 확보한 동탁이 중앙군을 흡수해 권력을 잡게 되는 상황까지는 당연히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십상시의 난 당시 환관에 비해 절대적 우세에 있던 하진 및 원소가 선택할 선택지는 확연히 아니었다. 그러나 지지기반 없이 권력만 잡은 동탁이 권력 독점을 위해 연이은 무리수를 던져 중앙이 개판이 된 바람에, 결국 이는 자신의 명망을 이용하여 엄청난 세력을 끌어 모을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다. 동탁에게 너만 칼이 있느냐고 호통치던 [[패기#s-1|패기]]는 결코 [[허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원소는 자신이 나서면 동탁의 허수아비 정부쯤은 압도할 만한 전력을 끌어모을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을 것이며 이는 어느정도 실현되었다. '''그 과정에서 [[후한]]은 사실상 멸망해버렸지만.''' [[십상시]] → [[동탁]] → [[한복(삼국지)|한복]] → [[공손찬]] → [[조조]]로 이어지는 라이벌 구도에서 대의명분을 가지고 노는 수준으로 상대방의 정치적 약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집요하게 공격하던 모습은 특기할 만하다. 여기서 조조를 제외하면 모두가 철저히 능욕당했고, 비록 원소 본인은 조조에게 패하고 세력이 사라졌으나, 유비와 동승이 만들고 관도대전 당시 원소가 확장한 '조조 = 천자를 겁박하며 국정을 농단하는 간신'의 프레임은 끈질기게 남아 [[유비]]와 [[손권]]이 충실히 계승한다. 이런 식의 정치적 [[프로파간다]]는 최소한 지지 세력의 결집에는 유효했고, 중앙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조조와 맞서려면 어떤 논리로 대응해야 하는 선례를 남겼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런 프로파간다를 처음 만든 이들은 유비와 동승이고 원소는 패배한 유비를 맞이하여 이들의 논리에 얻어탔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런 [[프로파간다]]를 확대하는데는 원소의 힘도 작용했다고도 할 수 있지만 말이다.][* 사실 원소는 동탁이 마음대로 즉위시킨 헌제에 대하여서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당장에 동탁이 장안으로 도망간 이후에 당대에 명망 높던 황족인 유우를 황제로 '''제멋대로''' 추대하였고, 이후 헌제가 이각과 곽사를 피해서 동쪽으로 도망왔을 때에도 전풍이 군사를 보내서 헌제를 모시자는 의견을 묵살하였다. 이후에 헌제를 모시게 된 조조가 강력한 세력을 가진 원소에게 대장군직을 추천하자 어쩔수 없다는 듯이 받기는 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자리가 필요해서 받은 것일 뿐 정작 헌제를 황제로써 대우하는 모습은 없었다. 역적 동탁이 세운 황제라는 것이 그의 명분이었다.] [[위선자]]라는 평가는 이미 당대에도 범람하고 있었지만, 그의 온후관대한 겉모습 때문에 당대에 원소를 추종하는 사람은 아주 많았다. 원소는 당대에 보편적인 모범으로 여겨지던 유교적 가치관에 더해 현인에게는 지식을 무인에게는 과감성을 무기로 추종되었듯 여러 계층에 따라 제각기 다른 미덕을 보이고 인정받으며 광범위한 추종자를 얻었으나, '희노의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고 평해지듯 진심을 보이는 일이 없었으며, 실제 행적으로도 단물이 빠지면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꿔 자신의 이득만을 챙기는 표리부동하고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코에이 삼국지 플레이어~~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른 미덕을 보인다는 것이 말이야 쉽지만 원소가 어떤 식으로 6년상을 지내며 효자임을 인정받았는지 생각해보면 무서울 정도로 섬찟한 인간성인데,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괴물'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시세를 읽고 명분을 만들어 세상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던 처세술은 삼국지 내에서 수위에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원소의 최대 강점중에 하나이자 동시에 그의 약점이었다. 원소의 발목을 잡았던 복잡한 태생과 천출 배경을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는 6년상 고행으로 세간에 인정을 받았던 타인의 평가였다. 그는 계속해서 십상시 학살, 동탁의 협천자 옹립 반발, 군벌연합 맹주 추대, 원가 몰락 동정표 획득 등 시세를 읽고 명분을 만들어 세상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냈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명분 쌓는것에 너무 예민한 그는 만약 본인이 헌제를 옹립하면 자신의 기반[* 동탁이 진류왕을 옹립했을 때 반발함으로 얻은 정치적 명분.]이 타격을 입을까봐 나서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그가 집착했던 '세간의 평가'가 자신의 수하격이었던 조조로 하여금 하루아침만에 조정의 수장이 되어 협천자 영제후를 할 수 있는 강력한 군벌로 급성장할 기회를 차지하게 만들었다. 다만 이는 어느 정도 결과론적인 측면이 있다. 물론 협천자를 했다면 어느 정도 이득을 얻긴 했겠지만 어차피 당대 최강은 원소였다. 정작 조조가 강력해진 이후에도 원소에 비해 절대열세였으며 조조 입장에선 생애 최대의 싸움이자 명운을 바꾼 관도대전 이후에도 원소의 세력은 조조보다 우위였다. 원소가 만약 지병으로 덜컥 죽지 않았으면, 혹은 후계자 자리를 확실하게 하고 죽었더라면 조조가 원소 세력을 멸망시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즉, 협천자를 하냐, 안 하냐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역적을 치는 자"의 포지션을 잡을 것이냐, "황제를 등에 업고 능멸하는 역적을 치는 자"의 포지션을 잡을 것이냐의 문제였지 (원소 입장에서는)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다. 물론 조조란 거대한 적을 만드는 결과를 낳긴 했지만, 만약 협천자를 했으면 원소의 적들로부터 "안티 동탁을 자처한 원소가 넥스트 동탁이 됐다"란 [[프로파간다]]가 만들어질 수 있으니 리스크가 있었던 것.[* 만약에 조조가 협천자를 하지 못했다면 '원소와 조조의 건곤일척'인 관도대전은 없었겠지만 조조가 '니가 제일 쎈데 천자까지 등에 업었으니 다 헤먹어라'하고 알아서 길 리가 만무하다. 원소의 독주를 아니꼽게 보는 이들은 천하에 널렸으니 반(反) 동탁 연합처럼 반(反) 원소 연합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고 이들은 어쨌든 원소를 역적으로 몰았을 것이다. 당시는 군벌들이 패권을 위해 싸우던 시기인만큼 1인자인 원소는 어떤 형태로든 견제를 받았을 것이다. 그것이 [[조조|강력한 라이벌 한 명]]과 전쟁이건, 다른 라이벌들의 연합 구도이건.][* 아마도 원소가 헌제를 확보하지 않은 것은 헌제가 난리통에 어디선가 죽고 후한 자체가 완전히 내려앉기를 바란 것이 아닌가 싶다. 즉, 원래 원술이 했던 짓(= 황제 즉위)을 사실 원소 또한 하고 싶었으나 그래도 원소는 시세를 원술보다 더 읽을 줄 알아서 기다렸는데 어느 샌가 조조가 냉큼 헌제를 살려서 옹위했던 것이고 그래도 당장 치지 않았던 것은 명분도 없었거니와 (후에 그 명분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유비다.) 조조가 한동안 원소에게 저자세를 취하기도 해서 치기가 꽤나 난감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북방에는 중국 최강의 군벌이었던 숙적 [[공손찬]]이 건재했던 이유도 있었고.] 한마디로 원소에 비해 절대적으로 약자였던 조조 입장에서 협천자 이후 명분을 등에 업고 그의 라이벌로 올라선 것 때문에 '''신의 한 수'''가 된 것이지, 이미 중원의 최강자이던 원소로서는 협천자 여부는 그의 세력이나 위상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즉, 명분에 집착하는 것이 그의 운신의 폭을 좁게 만들었지만, 이 점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작용했는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다. * 협천자가 원소 입장에서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 * 반론: 애시당초 수백년동안 이어져 내려온 한이라는 브랜드는 그리 쉽게 무너질 것이 아니었고 당장 지방 군벌에 불과한 동탁이 그렇게 전횡을 할 수 있었던 것도 헌제를 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시 최강의 군벌이었던 원소가 헌제까지 데리고 있다? 그렇다면 어지간한 다른 인물들은 그냥 깨갱하고 버로우타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대체 무슨 명분으로 패권을 주장한단 말인가? 애시당초 당시 패권을 정말로 내세웠던 인물들은 원소, 원술, 유표 등 극소수의 인물들이었고 나머지는 그냥 간섭하지 않으니 좋구나 정도 심산이었다. 애시당초 원소계 군소 군벌이었던 조조가 그리 쉽게 헌제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도 정말로 패권에 관심이 있는 인물이 많았다면 어림도 없는 소리다. 심지어 동탁의 부하인 이각과 곽사조차 헌제를 왜 확보해야 하는 지도 몰라서 낙양으로 그냥 보내줬을 정도인데 이들은 군사력만 놓고 보면 조조를 박살냈을 정도로 강했으나 이후 그 조조가 헌제를 옹위하게 되면서 금세 죽거나 쫒기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 재반론: "원소가 협천자를 하는 것만으로 어지간한 다른 인물들은 그냥 깨갱하고 버로우타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는 것은 당시 한황실의 브랜드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동탁이 당시 전횡을 일삼을 수 있었던 것은 힘이 있었기 때문이고, 한 황실은 거기에 명분을 더해줬을 뿐이다. 당연히 관도대전 이전 전성기 원소의 세력은 동탁보다 훨씬 강력했다. 그러나 유표나 조조 등 기타 세력도 반동탁 연합 당시 세력보다 더 강력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동탁이 헌제를 끼고 있건, 원소가 헌제를 끼고 있건 상황은 별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무슨 명분으로 패권을 주장한단 말인가?"라고 했는데, 이 점은 조조가 헌제를 끼고 있던 시점에 유비가 그를 공격하는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최강의 군벌이었던 조조가 헌제까지 데리고 있었는데" 대체 어떻게 유비가 그를 적대할 수 있었단 말인가? 저 이론대로라면 조조가 헌제를 옹립한 상태에서 원소를 이기고 하북지방을 먹은 이후 게임셋이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또한 조조가 헌제에게 옹립된 것은 당대 군벌들이 멍청이라서 헌제 옹립의 의미를 몰랐던 것이 아니고, 이각과 곽사가 권력을 서로 잡기 위해 경쟁하는 도중에 장안에서 '''탈출'''했으며, 이각/곽사는 낙양으로 보내준게 아니라 치열하게 추격했다. 천자가 달아나고 곽사가 그를 협박했으나 양봉이 군사를 보내 격파하고 곽사가 후퇴한 것은 연의가 아닌 정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헌제기에는 이후로도 그가 행군교위 상홍에게 업혀 배에 올라 물을 건너거나 병사들에게 비웃음 당하고 신하들이 수모를 당하고 부실한 음식을 먹은 내용 등이 나온다. 이각과 곽사가 몰락한 것은 정치력과 행정능력이 없는 이들이 단순히 이들의 군사력과 한황실의 브랜드만 믿고 기댄 얼간이들이기 때문인데, 조조와 원소 둘 다 이에 해당되는 군벌들이 아니라 헌제의 존재와 별개로 독자적인 세력을 만들고 유지하는 군벌들이었다.[* 이런 대표적인 케이스가 유표가 있다. 유표는 한황실과 미세하게 혈연이 닿아있는 것 외에 지지기반이 거의 없었으나 형주의 호족들과 연대, 원씨 형제와 차례로 한 외교, 원술이 보낸 손견의 격파 등 군사적 성과 등으로 사실상 황제와 다름없는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멍청이들조차 황제 옹립의 의미를 알고 있을 정도니, 다른 군벌들이 그 의미를 몰랐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억측이다. 또한 패권을 노릴만한 인물들이 (조조 외에) 원소, 원술, 유표 뿐 극소수였다는 서술도, 저들이 미개발지역이 많은 강남과 익주, 척박한 서량 등 지역을 제외한 전 중국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하면 극소수이긴 커녕 '당대 가장 큰 군벌들은 모두 패권을 노리고 있었다'고 해석하는게 맞다. 어쨌거나 조조건 원소건 황제를 옹립하지 못했다고 해서 뿔뿔히 흩어져버릴 군벌들이 결코 아니었다. 실제로 조조가 급격히 성장한 것이 협천자 이후기 때문에 '협천자=조조가 1인자로 올라선 배경,이라고 단순히 이해하기 쉬운데, 조조는 그 이전에 이미 여포와 장막의 반란을 진압하고 연주를 완전히 장악한 상태였다. 즉 황제를 등에 업었기 때문에 군벌로 일어선게 아니라, 반대로 힘이 있었기 때문에 황제를 등에 업고 쭉쭉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조가 협천자를 하면서 얻은 것은 막강한 '''명분'''이었지, 황제의 옹립 덕분에 힘이 늘어난 것은 아니다. 조조는 이후 수춘을 얻고 서주를 손에 넣는 등 군벌로서 성장했다. 그런데 이게 그가 협천자를 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것이었을까? 전혀 아니다. 즉, '한 황실'이란 [[브랜드]]는 막강한 명분을 쥐어주지만, 명분 외에는 실질적인 힘을 주는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돌아와 "어떤 명분으로 다른 군벌들이 패권을 주장하냐"고 한다면 당연히 당시 황제를 옹립하지 못했던 모든 군벌들이 내세운 명분과 같다. 바로 "역적이 황제를 농락하고 있기 때문에 황실을 구원해야한다"는 명분이다. 원소와 조조의 대립은 둘 다 야심가로서[* 원소는 칭제까지 염두에 두고 있던 인물이다. 실제로 배송지의 주석에는 당시 원소가 경포를 시켜 칭제를 권하도록 했다가 부하들의 여론이 안 좋자 죽였다고 나와있다.] 둘 다 패권을 노리던 자이다. 둘은 누가 황제를 옹립하는 것과 상관없이 결국엔 "황제를 등에 업고 황실을 능멸하는 저 역적을 처단해라!" vs "황제의 명을 받들어 저 역적을 처단해라!"는 구도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관도대전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보자. 당시 원소는 조조를 치고자 했으나 명분이 없었고, 동승사건의 생존자인 유비가 조조에 의해 멸망하면서 원소에게 의탁하자 업성에서 이백리 밖까지 나와 맞이하면서 환대했다. 그런데 유비는 '''원래 원소의 수하가 아니었다'''. 즉, 조조의 황제 옹립 → 유비가 여포에게 패주 → 유비가 조조에게 의탁 → 유비 탈출 직후 동승의 조조 암살 시도 사건 → 조조가 유비 격파, 이후에 원소에게 의탁하면서 명분을 준 것이다. 즉 애초에 원소가 헌제를 확보했다면 유비가 원소에게 의탁하는 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원소가 헌제를 옹립했다고 해서 동승이 원소를 암살 시도하고 원소가 유비를 격파해서 망한 유비가 조조 찾아가고... 이럴 거란 얘기가 아니다. 포인트는 명분은 '''얼마든지 만들려면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유비 외에도 황실과 관계된 이들은 얼마든 있으며, 황제의 명이든, 황실의 후예든 뭐든 끌어들이면 가능하다. "당대의 군벌들이 명분이 없기 때문에 헌제를 옹립한 원소에게 대적하지 못하고 깨갱하는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난세 당시의 상황에 대해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보는 시각이다. [[조선시대]] 같이 강력한 중앙집권형 왕조라면 왕과의 거리 = 힘이 되지만,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처럼 중앙집권화가 약한 고대 중국에 황실의 권위와 힘이 떨어진 [[난세]]라면, 명분은 플러스 알파 요소일 뿐이고 중요한 건 우선적으로 [[무력|힘]]이다.[* 명분이 강력한 무기란 점, 한 황실이 강력한 브랜드란 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힘이 우선적인 요소란 것이다.] 추가로 협천자 자체는 큰 명분을 주는 것이 맞으나, 애초부터 원소가 '''헌제를''' 옹립하는 것에선 얻을 것이 전무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즉 위의 재반론 항목은 "협천자 자체가 원소에게 줄게 없었다"가 아니라 "'''헌제를''' 옹립하는것에서 원소가 얻을 게 없었다"는 의미이다. 조조는 헌제를 옹립하면서 큰 명분을 얻었고, 이를 유용하게 써먹었다. 그러나 원소에겐 이런 식의 실리를 얻는게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원소는 이미 유우를 황제를 추대했기 때문이다. 즉 조조에 앞서 협천자를 시도했으나[* 협천자에 있어서 유우-원소는 헌제 유협-조조보다 훨씬 위력적이 될 수 있다. 그냥 똘똘한 어린아이에 불과한 유협과 달리 유우는 당대 최고의 명망과 능력까지 갖춘 인물이었고, 원소는 이때 조조와 비교불가로 강력한 군벌이었기 때문. 이렇게 됐다면 당대 모든 군벌은 명분과 세력에서 원소에게 크게 지고 들어가는 상황이다.], 정작 유우가 충신이었기에 실패한 상황. 그런데 유우를 추대할 때 내세운 명분이 무엇이었는가? 바로 역적 동탁이 세운 황제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우에게 까이고 헌제를 옹립하면 스스로 세운 명분이 전부 날아가는 상황이다. 아무런 세력도 없는 황제를 내세우는게 명분을 얻기 위해서인데, 그 황제를 내세우는게 오히려 명분을 깎아먹는다면 협천자를 하는게 아무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손해가 된다. 심지어 명분도 깎아먹으면서 위에 언급한대로 적들이 짜는 안티 동탁 프레임 안에 쏙 들어가게 되는 천하의 멍청한 짓이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원소는 결코 협천자에 무심한 건 아니었다. 다만 그가 올인했던 유우가 하필 라이벌 [[공손찬]]의 손에 죽는 바람에 일이 틀어지게 된 것이지. 그런데 보니 하필 또 조조가 가망이 없을 거라고 본 유협을 모시고 협천자에 성공해 버린 것이 또다른 문제였다.[* 당연하지만 원소는 절대로 헌제를 협천자할 수 없었다. 동탁이 세운 황제라고 그렇게 디스했으니 명분을 내세울 수 없었던 것. 이는 원소가 명분을 내세우기를 좋아한 것과 상관없이 불가능했던 것. 결국 원소는 유비에게서 이 명분을 찾아야 했다.] 이로 인해 명분은 결국 조조에게 돌아갔고 원소는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었다. 위에서 지적되었듯이 한왕조는 실질적인 힘을 주진 못했지만 막강한 명분을 주는데, 그 명분이란 것은 당시에 충분히 영향이 컸다. 실제로 분명 헌제를 옹위했다고 해서 조조와 원소의 힘의 차이가 역전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명분의 힘은 당대 엄청나게 작용했다. 당장 [[공손찬]]이 유우를 죽이니까 그가 데리고 있던 유능한 부하들(= 유비, 조운, 전해 등)이 전부 흩어졌던 것처럼 원소도 한 왕조를 따르는 이들이 떨어져 나가거나 원소를 공격하는 등의 이탈을 겪었고 자칫 잘못하면 세력이 와해될 위기가 전혀 없었다고 하기는 어려웠던 것. 사실 원소의 세력이 크긴 했지만 세력 전체에서 순수 원소의 지분은 그리 크지 않았다.[* 원래 원소가 제대로 된 세력을 얻은 것은 한복을 어떻게든 쫒아내고 그 세력을 흡수했던 것이다. 즉, 원소는 생각보다 기초 체력 자체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던 것. 원소가 그렇게 자신의 신하들을 갈라치기를 한 것도 결국은 이 때문이었다. 반면 조조의 경우 조씨 일가 및 하후씨 일가라는 일족의 힘에 더해 신하들도 호족보다는 자신이 직접 모은 이들이 더 많았고 이들을 일족 다음으로 중용했다.] 만약 원소가 자신의 세력의 크기만 믿고 명분을 소홀히 했다면 굳이 유비를 버선발로 맞이할 이유도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