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소(삼국지) (문단 편집) === 행정적 능력 === 원소는 호족과 세력가들은 숙청하면서 백성들에게는 유화적인 선전 책략을 매우 잘 썼다. 집권을 위한 정치적 능력은 [[만렙]]에 가깝지만, 강역 내에서의 실제적인 통치 능력은 특정한 정책을 펼쳤다는 기록이 없어 구체적인 상을 그리기 어렵다. 긍정적인 기사와 부정적인 기사가 혼재하는데, 부정적인 기사로는 조조가 원상을 격파하고 기주를 평정한 뒤 기주민들에게 내린 포고령에 따르면 원소의 정치는 방만해서 호족들의 발호가 심했다고 하며, 곽가전에 언급된 십승십패론에서 곽가는 한나라의 정치가 지나치게 관대해서 망했는데, 원소는 관용으로 그르쳐진 정치를 관용으로 바로잡으려 하니 답이 없고, 사나움으로 바로잡아 위아래가 제각기 분수를 아는 조조의 통치가 훌륭하다고 평했으며, 왕수전에서도 원소의 비호 아래 권세가들이 재물을 많이 축적해 심배의 재산이 억대에 달했다는 기사가 있다. 한편 긍정적인 기사로는 [[순유]]가 원소는 평소 한족과 [[오랑캐]]를 아우르며 널리 은혜를 베풀었으니 비록 (조조가) 하북을 점령했지만 진심으로 이들이 (조조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진언한 순유전의 기사가 있으며, 헌제춘추에서는 원소의 정치가 관후하여 크게 존경을 받았고, 원소의 통치가 미치는 하북 4주의 지체 높은 [[사대부]]로부터 비천한 아낙네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을 막론하고 원소를 흠모해 불평하는 목소리가 없었으며, 원소가 죽었을 때는 온 도시의 저자가 통곡과 비탄으로 마비되었으며 심지어 그의 죽음을 두고 부모상을 치르는 백성들까지 있었다고 한다. 한편 괴담집인 [[수신기]]에는 도삭군 신앙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는 원소가 사후 민간에서 신격화되어 숭배받던 흔적으로 보인다. 긍정적으로 보는 쪽이든 비판적으로 보는 쪽이든 관용과 은혜로 다스린다는 평가는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는데, 여러 정황을 봤을 때 협천자라는 강력한 권위를 통해 중앙집권적인 정책을 추진했던 조조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토호들과의 느슨한 연립체계에 가까웠고, 그만큼 권력이 분산되어 효율적인 중앙집권 체제를 만들진 못했던 것이 사실에 가까워 보이지만, 호평을 받은 기록을 감안한다면 그래도 큰 문제는 없이 그럭저럭 운용되었고, 명색이 은혜와 관용을 내세웠던 다른 군웅들보다 도드라지는 관용의 정치를 펼처 백성들의 지지를 얻은 것은 맞는 듯하다. 물론 은혜와 관용을 내걸었다곤 하나 이것도 연이은 군사적 성공으로 안정적인 강역을 확보해 여유가 생긴 뒤에나 그랬던 것으로 보이고, 궁핍했던 초반에는 잘만 약탈하고 다녔다.[* 계교전투 무렵 공손찬이 발표한 찬표소죄상에서 이런 원소의 행태를 비판했는데. 원소는 아예 날을 정해 번갈아가며 군현을 노략질했으며 상납을 거부하는 호족들은 명망이 높든 전에 고관을 지냈든 상관없이 감금, 고문하며 돈을 뜯어냈다.][* 물론 유비를 제외하곤 삼국지 주요 군웅들 중 약탈을 안했다고 볼 수 있는 인물들은 없으니, 딱히 원소만의 허물이라곤 볼 수 없지만 말이다.] 또한 196년의 협천자 논의부터 시작해 관도대전에서 정점을 찍은 원소와 호족 출신인 저수, 전풍 등과의 격렬한 대립과 곽도를 필두로 하는 예주 출신 인사들의 대두는 어리석은 암군 원소와 현명한 충신 저수, 전풍. 간신 곽도, 봉기의 구도로 보는 것이 전통적인 해석이었으나 최근에는 원소의 권력 강화에 따른 토호세력 숙청과 일족, 친위 파벌 육성을 통한 정치체계 개편으로 보는 해석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