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숭환 (문단 편집) === 기사년의 변(己巳之變, 기사지변, 기사만족대겁략) === 영원 및 금주 전투에서 체면을 구긴 [[홍타이지]]의 가슴에는 한 가지 사실이 각인되어 있었다. 바로 '''원숭환이 지키는 한, 명나라의 요서 방어선은 절대 돌파할 수 없다'''라는 뼈저린 현실이었다. 홍타이지는 원숭환이 지키는 요서 방어선의 돌파가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중대한 방향 전환을 하게 된다. 첫 번째 방향 전환은 침공 경로의 변경이었다. 후금의 근거지에서 명나라를 공격하는 최적 루트는 누가 봐도 요서를 지나 산해관을 통하는 길이라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길은 원숭환이 버티고 있어 돌파가 불가능했다. 후금으로서는 우회가 불가피했다. 홍타이지가 선택한 경로는 원숭환이 지키는 요서 일대를 우회하여 몽골족의 영역을 지나 하북 북방의 장성 일대인 용정관(龍井關)과 대안구(大安口), 희봉구(喜峰口)를 통해 직접 북경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이 경로의 장성 북쪽 일대는 수렵, 채집과 원시적 농경민족인 여진족의 땅이 아니고 유목민인 몽골 호르친 부족의 영역으로 후금에게는 미지의 땅이었다. 그러나 이 무렵 후금은 여러 번의 전쟁과 혼인을 통한 회유[* [[효장문황후]]를 포함한 홍타이지의 호르친부 출신 5비들이 이 과정에서 홍타이지의 처첩이 되었다.] 등으로 호르친 부족을 완전히 포섭하고 있었다. 두 번째 방향 전환은 바로 전쟁 목적의 변경이었다. 그 동안 후금의 전쟁은 조선을 복속시키기 위해 조선을 침공했던 정묘호란을 제외하면 대부분 정복 전쟁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 땅은 모두 자신들의 영토가 되었고 그 주민들은 모두 자신들의 백성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부터 전쟁의 목적은 정복을 통한 영토 획득이 아니라 인력과 물자 획득을 목적으로 하게 된다. 정복전에서 약탈전으로 전쟁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이다. 홍타이지는 사촌 아우인 지르갈랑에게 영원과 금주 등을 가볍게 공격하게 하여 원숭환의 시선을 요서 일대에 묶어두고는 1629년 10월 2일 100,000명의 대군을 직접 지휘하여 장성을 넘었다. 경로는 위에서 말했던 용정관(龍井關), 대안구(大安口), 희봉구(喜峰口)였다. 장성을 넘은 후금군은 10월 26일 마침내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성 코앞까지 진격해왔다. 명나라로서는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폭탄드랍~~ 명나라 조정과 북경 시민에게 전쟁이란 무릇 1,000리 밖 요서의 일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북경성 자체가 포위되어 버렸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아직 홍타이지가 요서를 우회하여 북방으로 침공했다는 사실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분명히 >'''“원숭환이 지키는 요서 방어선에 막혀 산해관 안으로 들어오는 건 꿈도 못 꿀 후금군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 가서 눈 흘긴다고, 사람이 어이없는 사태를 만났을 때 정상적 사고를 잃어버리고 엉뚱한 곳에다 화풀이를 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북경 시민들에게 원숭환이 길을 내주어 후금의 오랑캐들이 침공할 수 있었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원숭환의 정치적 반대파인 엄당(閹黨)[* 선제인 희종 천계제 시절 환관 위충현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세력을 형성한 당파로, '''엄'''(閹)은 환관이라는 뜻이다. 환관인 위충현이 만든 정파라서 엄당이라고 불리지만 주요 인사들은 환관이 아닌 조정 대신들이었다. 숭정제 즉위와 함께 세력이 약해지지만 그래도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후 명나라가 멸망하고 남명 정권이 청나라에 대항해서 마지막 싸움을 힘겹게 벌일 때도 이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에서 이 소문을 더욱 부채질했다. 엄당에게 원숭환은 자기 일파인 모문룡을 죽인 정적인 동시에 해마다 모문룡이 보내오던 뇌물을 차단한 경제적 원수이기도 했다. 또 당시 조정 대신들은 북경 인근에 토지와 별장을 가진 자가 많았다. 이들도 자신의 재산이 침해된 원인을 원숭환에게 돌렸다. 결국 조정 대신들과 북경 주민들의 마음속에 원숭환을 원망하는 마음이 커졌다. 게다가 사태를 제대로 인지한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불행히도 옛날식 세는 나이로 19살, 지금 한국으로 따지면 고등학교 3학년에 불과한 애송이였던 [[숭정제]] 역시 사태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원숭환을 탓했다. 원숭환은 예전부터 후금이 자신이 지키는 요서를 우회하여 북방으로부터 침공할 위험이 있다는 경고를 조정에 알리고 경계를 촉구했었다. 하지만 그 자신도 그렇게 갑자기 후금의 우회 침공이 시작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듯 하다. 후금의 북경 침공 소식을 들은 원숭환은 대경실색하여,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급히 모아 북경으로 달려왔다. 산해관에 도착하자 준화성(遵化城)[* 지금의 [[허베이성]] [[탕산시]] 쭌화시.]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참장 조솔교에게 4,000명의 군사를 나눠주며 후금의 공격을 받는 준화성을 구원하도록 했다. 그러나 왕원아(王元雅)가 사수하던 준화성은 조솔교의 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함락되었고[* 내부에 후금과 내응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후금의 복병을 만나 조솔교와 그가 이끈 원병도 전멸하고 말았다. 후금군은 함락된 준화성에서 약탈과 대학살을 벌였는데 이 소식은 그대로 북경에 전해져 북경 시민들을 더욱 두렵게 만들었고, 원숭환에 대한 원망도 같이 깊어졌다.('''준화성 전투''') 한편 원숭환은 9,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11월 17일 북경 광거문(廣渠門)에 도착했다. 부총병 주문욱은 먼길을 달려와 병사들이 몹시 지쳤으니 일단 북경 안으로 들여보내 휴식시키자고 제안했지만 원숭환은 거절하고 북경성 밖에 주둔했다. 그리고 11월 20일 광거문 밖에서 원숭환이 인솔하는 9,000명의 병사는 6시간에 걸쳐 후금군과 10차례 이상 싸워 결국 이들을 물리치는데 성공했다.('''광거문 전투''') 혹자는 이때 원숭환이 후금의 대군 100,000명과 싸웠다고 하지만 당시 후금군의 대부분은 약탈에 바빴으니 아마도 실제로는 후금의 선봉 일부와 싸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싸움은 원숭환이 이끄는 명나라 군사들이 과거와 달리 얼마나 잘 훈련되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사르후 전투]] 이후 명나라 군대는 단 한 번도 후금군과 평지에서 싸워 이겨보지 못했다. 아니 평지는커녕 수성전조차 못하고 지리멸렬하다가 원숭환 등장 이후에야 겨우 제대로 된 수성전을 보여주게 된다. 그런 약졸 명나라군이 1,000리의 먼 길을 달려온 굶주리고 지친 몸으로 평지에서 후금군을 무찌른 것이다. 이는 원숭환이 수성전만이 아니라 야전에서도 충분히 유능하며, 다수의 적과 평지에서 싸우는 것도 회피하지 않을 정도로 용감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11월 23일 후금군을 물리친 원숭환은 병사들이 오랜 행군과 전투, 그리고 장기간의 노숙으로 지칠대로 지쳤으니 성 안으로 들어가 휴식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숭정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이미 숭정제의 머리에는 원숭환에 대한 의심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원숭환이 반역을 일으킬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때문에 원숭환이 이끄는 병사들은 음력 11월 북경의 차가운 겨울 날씨 속에서도 성밖에서 노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환경 속에서도 원숭환은 11월 27일 북경 좌안문(左安門)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다시 후금군을 격파했다.('''좌안문 전투''') 평지의 싸움에서도 원숭환을 이기기는 어렵다고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북경 함락이 목적이 아니었으니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홍타이지는 군사를 남해자(南海子)[* 북경성 남쪽 교외에 위치한 명, 청 황실의 사냥터였다. 현재 이곳에는 공원이 들어서 있다.]까지 철수시켰다. 하지만 약탈전은 계속되었다. 통주(通州)[* 현재의 [[베이징시]] [[퉁저우구]].]에서는 1,000척에 가까운 조운선(漕運船)을 불태우기도 했다. 또한 하북 일대는 철저하게 약탈당했다. 이때의 약탈은 대단한 성공이어서 병사 1명당 우마(牛馬) 1마리씩이 돌아갈 정도였다고 한다. 더불어 수만 명의 남녀 포로도 획득했다. 후금 최대의 약점은 인구 부족이었기에 잡혀간 이들은 후금의 영토로 끌려가 요동 일대의 농지를 개간하고, 경작하게 될 것이었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후금의 약탈전이 '''기사년의 변'''이었지만 후금 입장에서는 엄청난 대박이었다. 후금의 가장 큰 약점인 인구 부족과 고질적인 물자 부족을 해결할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낸 것이었다. 명나라의 약점을 발견한 후금은 이때부터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하북과 산서의 장성 루트를 통해 10여 차례에 걸쳐 대규모 약탈전들을 감행한다. 이제 후금에게 전쟁은 위험은 적고, 수익은 높은 최고의 경제 활동이 되었다. 이렇게 전쟁이 최고의 경제 활동이 된 것은 후금 정부에만 한정된 일이 아니었다. 전쟁은 후금의 백성 개개인에게도 최고의 경제 활동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이 일어나 가족이 출전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온 가족이 비탄에 잠겨 울음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만주족 가정에서는 이와 반대로 전쟁이 일어나 집안의 가장이 전투에 나가게 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울음소리는커녕 집집마다 환성이 터져 나왔다. 당시 기록을 보면 거리에서 들리는 환호성을 듣고 원정이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전쟁은 참전하는 팔기병 개개인과 그 가족들에게도 위험은 적으면서 엄청난 수익을 가져다주는 대박의 기회였다. 재산은 물론이고 잘하면 사회적 지위까지 일거에 상승할 수 있었다. 이런 기회는 팔기병만이 아니라 이민족이나 노예에게도 똑같은 기회를 주었고, 그들까지 어떻게든 전쟁에 한 발 담그기 위해 노력했다. 하북, 산서, 산동 등 명나라의 황하 이북은 철저하게 약탈당하고 유린당했으며, 그 결과는 명나라 재정의 붕괴와 도적의 창궐이었다. 물론 '''[[이자성]]'''이나 이자성 이전의 두목인 고영상이 도적이 된 것은 후금의 약탈보다 조금 이전이지만, 명나라의 무능함에 질려버린 각지의 백성들이 이자성을 비롯한 도적들을 따르게 됨으로써 도적떼를 농민군으로, 더 나아가 왕이나 황제를 자처하는 군웅의 레벨로까지 성장케 한 원동력으로 후금의 만리장성 우회 약탈전을 지목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명나라로서는 후금의 이런 침공을 막아낼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바로 후금의 침공로로 이용되고 있는 하북, 산서의 장성 일대에 요서 방어선에 버금가는 방어선을 건설하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걸 이룰 수 있는 인물은 명나라가 아무리 땅이 넓고 사람이 많다고 해도 단 한 사람, 원숭환 뿐이었다. 하지만 이때 그에게 위기가 닥쳐오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