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효 (문단 편집) == 생애 == 신라의 압량주(押梁州)(현 [[경상북도]] [[경산시]])[* 공교롭게도 [[고려]]시대 [[승려]]이자 [[삼국유사]]의 저자로 유명한 [[일연]]도 고향이 같다. 일연이 태어난 당시 경산의 지명은 장산군. 그래서 [[경산시]]에는 원효와 일연의 이름을 딴 원효로와 일연로가 자리하고 있으며, 원효ㆍ설총ㆍ일연을 묶어 '삼성현'으로 부르고 '삼성현로'라는 도로도 만들어져 있다.]에서 내마(奈麻)였던 담날(談捺)[* 소설 <원효대사>를 쓴 소설가 한승원에 따르면, '담날'이라는 이름은 우리말로 '다음 날'이라는 뜻이라고 한다.(출처: 한승원 <꽃과 바다>)]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 삼국유사에는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한다.]으로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은 것으로 보아, 뼈대 있는 집안인 것만은 분명하다. 다만 [[진골]] 출신임이 확실한 의상과 달리 원효는 출신이 확실치 않으며, [[6두품]] 출신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원효와 그 아들 [[설총]]을 중시조로 두는 경주 설씨(순창 설씨)는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신라 6부의 촌장 가운데 '호진'의 자식 '거백'이 설씨를 하사받아 '설거백'이 되었다 하여 가문의 시조로 여기고 있다.] 중국에서 성이 설씨인 신라인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묘지명에 '설씨는 신라의 김씨에서 나왔다.'는 문구가 있는 점, 아무리 왕의 뜻이었다고는 하나 공주와 결혼했다는 점을 들어 사실은 신라 방계 왕족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소수 설에 불과하다. 오히려 신라 왕족인 [[요석공주]]를 왕후로 맞이해 설씨 족단에 편입되었다는 설이 더 일리 있는 추정일 듯. 출가 시기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는데 원효에 대해서 중요한 사료 중 하나로 취급되는 송고승전에서 관채지년에 출가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어린 나이에 출가한 것으로 보고 있다.[* 관채지년은 양쪽으로 머리를 땋아 올리는 어린 나이를 뜻하는 말인데, 15~16세 정도를 말하느냐, 8~9세 정도를 말하는냐에 대한 이견이 있다. 어쨌든 어린 나이에 출가하였다는 것이 현재로선 정설이다.] 29살에 황룡사로 출가했다거나 출가 이전에 화랑이었다는 말도 꽤 알려졌지만 문헌적으로는 이렇다 할 근거가 없는 이야기로 보인다. [[석가모니]]처럼 모친이 해산하러 가는 길에 산기를 느끼고 밤나무 사이에서 [[출산]]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 밤나무에서 열리는 [[밤(열매)|밤]]은 1톨이 사발만 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절에서 일하는 [[머슴]]이 "우리 절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한 끼에 밤 2톨밖에 안 준다."하고 관가에 고발했는데 [[관리]]가 고발을 받고 와서 막상 보니 밤 1알이 큰 사발만 한지라 "앞으로는 한 끼에 밤 1톨만 주라." 하고 판결을 내렸다고 하며 원효의 집터로 알려진 곳에는 사라사(娑羅寺)라는 절도 있었다고 한다. 사라사 터로 알려진 자리에는 제석사라는 절이 있는데 건물은 후대에 지었다고 한다. 원효는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출가하고 이렇다 할 스승이나 종파 아래서 일정하게 배운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배움을 받으며 본인의 학문을 이어나갔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반고사라는 절에 머물며 낭지선사(朗智禪師)라는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기도 했다고 한다. 삼국유사 5권에 등장하는 신라 반고사(磻高寺)는 굴화 영취사의 서북쪽에 있는데, 원효대사는 이곳에 머무르며 낭지선사의 가르침을 청하며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저술했다고 한다. 문제는 낭지선사는 삼국사기 3권의 법흥왕(法興王) 14년(527)에 영취산(靈鷲山)에 법장을 열었다는 내용으로 처음 등장하는 사람이란 것이다. 그가 약 20살쯤부터 영취사를 지어서 머물었다 해도 617년 태생인 원효대사가 10살쯤 되었을 때는 이미 120살 가까이가 되니 연대상으로 보아도 도무지 무리가 있다. 참고로 원효가 머물었다는 반고사로 추정되는 절 터 근처에는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울주 천전리 암각화]]가 존재한다. 애초에 이 두 문화재를 발견한 계기가 반고사 터를 찾고자 폐사지를 답사함이었다.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을 두 번 시했으나 실패, 이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후 상당히 특이한 방법[* 거리에서 "누가 [[과부|자루빠진 도끼]]를 내게 주려나,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어볼 텐데."(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라는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무열왕은 원효가 귀부인을 얻어 장차 훌륭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 것으로 알아듣고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나쁠 것이 없다며 자신의 딸인 요석궁의 과부 공주를 이어준다.]으로 [[태종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신라시대에 손꼽히는 유학자 [[설총]]을 탄생시킨 것도 유명하다.[* 원효는 태종무열왕의 사위이자 [[김유신]]의 동서가 되는 셈.][* 일연은 이에 대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인 파계가 아니라 실계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어쩔 수 없이 계율을 어기게 되었다고 강조한 듯하다. 이는 무열왕이 말한 현인 탄생의 필요성 등이 그 이유일 것이다.] 다만 원효의 아내가 요석궁의 과부 공주라는 이야기는 일연이 웬만한 원효의 업적은 당전, 행장에 기록되었으니까 대신에 향전에서 한두 가지 기이한 일을 쓴 것이라 언급하였다. 실제로 송고승전이나 서당화상비, 삼국사기 등에서 설총의 어머니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요석 공주와의 이야기는 단순히 설화일 것이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어쨌든 계율을 어긴 이후에는 머리를 깎지 않고 속세의 옷을 입으며 스스로를 소성거사(小姓居士)[* 소성은 마음이 작다는 것, 거사는 남성 재가불자를 의미한다. 즉 원효가 계를 어긴 스스로를 낮추는 표현이다.]라 칭하며 상당히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말이나 행동을 험하게 하거나 술집, 기생집을 드나들기도 하고, 금속으로 된 칼이나 쇠로 만든 지팡이를 들고 다니거나, 소(疏)를 짓고 강론을 하거나 사당에서 여염집에서 잠을 자고, 혹은 산, 강을 따라 좌선을 하는 등 일정한 법식이 없는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원효의 파계와 자유분방한 행보는 속세에 돌아와 낮은 민중, 중생들과 함께하는 대중 교화를 실천하고자 하는 의도로 해석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원효는 파계 이후에도 활발하게 저술 활동을 한 것은 물론 화엄경의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의 문구를 따서 '무애'라는 노래를 지었고 여러 촌락에서 이를 노래하고 춤추며 대중 교화를 실천한 것으로 유명하다. >천촌만락(千村萬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음영하여 돌아오니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호를 알게 되었고, 모두 나무(南舞)를 칭하게 되었으니 원효의 법화가 컸던 것이다. > ---- > [[삼국유사]], 원효불기 (元曉不羈 ) 이런 식으로 온갖 파격적인 행보를 일삼고 돌아다니다 보니, 당시 [[승려]]들 가운데는 원효를 못마땅해하는 시선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송고승전에 따르면 [[황룡사]]에서 인왕백고좌회[* [[태조 왕건]]에도 인왕백고좌회가 나온다. 나라의 이름 높은 승려들을 두루 모아 여는 법회이다. 여기서는 도선이 법력으로 날씨를 바꾸고 [[황룡사]] 목탑을 기울이는 허구가 가미되었다.]라는 법회를 열었는데 고향 [[상주시|상주]]에 머무르던 원효도 추천을 받아 참석하기로 하였으나 당시 승려들이 원효의 파계 행적을 문제삼아 참석을 반대했다. 왕비가 병이 나자 약을 찾아 중국으로 사신을 보냈는데, 사신은 바다 위에서 [[용궁]]으로 초대를 받아 [[용왕]]으로부터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이라는 [[불경]]을 얻어 돌아왔다. 그런데 용왕이 준 불경은 처음부터 순서가 이리저리 뒤섞인 데다 내용도 어려워서 승려들 가운데 아는 사람이 없었다. 대안(大安)이라는 승려가 왕명을 받고 순서를 맞추기는 했지만, 대안 또한 "불경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승려는 원효 한 사람뿐"이라며 풀이하기를 사양했다. 원효는 고향에 머무르다가 불경의 내용을 풀어 강의해달라는 왕명을 받고 [[소]]를 타고 [[경주시|서라벌]]로 갔는데 가는 동안 소의 뿔 사이에 경전을 놓고 나흘 만에 소(疏, 해설집) 5권을 썼다. 그런데 이번에는 법회를 하루 앞두고 원고를 누가 훔쳐가는 바람에, 원효는 법회를 나흘만 더 연기해달라고 요청하여 약소(略疏, 요약해설집) 3권을 써서 강의할 수 있었다. 강의를 마친 뒤 "지난 날 서까래 100개를 고를 때는 끼지 못했었는데, 이제 용마루 하나를 고르는 자리에는 나 하나만이 있구나."라고 말하니 법회에 모인 승려들이 부끄러워하고 참회하였다고 한다. 이때 원효가 지은 해설집이 바로 [[금강삼매경론]]이다. 이후의 행적은 불분명하나 경주 고선사(高仙寺) 터에서 원효의 행적을 기려 세운 서당화상비가 발견되었는데 비문에는 원효가 686년 3월 30일 70세 나이로 혈사(穴寺)에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선사 터는 [[https://ko.wikipedia.org/wiki/%EB%8D%95%EB%8F%99%EC%A0%80%EC%88%98%EC%A7%80|덕동댐]]이 만들어져 수몰되었고 절터에 있던 석탑은 지금 [[국립경주박물관]] 뒤뜰로 옮겨 보관 중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