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정척사파 (문단 편집) === 비판적 평가 === 위정척사파는 [[성리학]]을 절대적인 기치로 삼으며 지나치게 편파적이고 배타적인 면모를 보였다. 먼저, 위정척사론에서 이야기하는 중화(中華)는 한(漢)족의 유교적 정신을 의미하는데, 청나라가 만주족에 의해 세워진 나라이기에 한족의 정신을 상실했다는 당대의 관점을 생각해보면 실제로는 중화사상의 변방적 의미의 계승자이자 한족의 나라가 복원될 때까지의 임시 거점인 조선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중화 숭배의 정신을 벗어난 일은 없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으며, 이는 [[소중화]]로서 청나라에 예속된 번국으로서가 아닌 조선이 곧 중화라는 주체성의 선언이기도 하였다라고 변명하기도 하지만,[* 이 조선 중화라는 것도 명나라가 오랑캐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게 멸망하고 나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삼전도의 치욕]]을 겪으며 복속된 조선이 청나라를 국력으로 이길 수는 없으니 '중화가 조선에서 부활했고, 명나라도 멸망했지만 조선이 계승했으니 복수 안 해도 된다는 정신승리의 일환이었다.[[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3/13/2019031300027.html|#]] 애초에 효종과 송시열이 내세우던 북벌 역시 청나라라는 외부의 적을 설정해 왕권과 신권을 강화하고 백성들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는 의미가 강했다, 그리고 조선통신사 조태억이 “천하가 모두 청나라를 따르지만, 우리 조선만은 대명의 제도를 고치지 않으니, 청나라 오랑캐들도 우리를 예의의 나라라 하여 감히 예의에 벗어난 것으로 우리에게 가하지 못하며, 이 하늘 밑에 조선만이 진정한 중화다."라고 허세를 부리다가 일본 유학자인 아라이 하쿠세키(新井 白石)에게 "그것도 오랑캐 청나라가 봐줘서 그 정도 아니겠는가?"라고 조선이 오랑캐라고 비웃던 일본에게도 비웃음을 당하는 수준이었다.[[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402A_0020_010_0020|동사일기곤 강관필담]]] 청나라가 멸망하고 나면 결국 만주족의 나라가 아니라 한(漢)족의 나라를 숭배하는 사대주의가 될 뿐이었다.[* 일례로 [[유인석]]이 중국으로 망명했을 때 쑨원에게 '우리나라는 대중화의 뒤를 잇는 소중화로 중국을 지극정성으로 섬겼으며 한족의 중국이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다행히 당신이 그렇게 했으며 중국이 없으면 우리도 없다.'는 내용의 흥중화국정부서[[https://www.krpia.co.kr/viewer?plctId=PLCT00005160&tabNodeId=NODE05226877&nodeId=NODE05634785&keyword=%E8%88%87%E4%B8%AD%E8%8F%AF%E5%9C%8B%E6%94%BF%E5%BA%9C^|#]]라는 편지를 쓴 적이 있다. 그러나 유인석이 찬양하던 쑨원은 조선을 옛날부터 중화대륙의 속국이었지만 사악한 서양오랑캐들과 결탁한 일본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탈환해야 할 중국의 잃어버린 옛 영토로 생각하던 인물이었고 중국이 다시 강력해지면 조선은 저절로 중국 밑에 다시 기어들어올 것이라고 하던 배타적, 팽창적 중화주의의 상징 같은 인물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위에도 언급했지만 당장 화서학파의 사상적 기반에는 송시열의 숭명배청론이 있다. 요약하자면 송시열 계열의 유학자들은 도통과 현실적인 계승자를 구분하고 오랑캐인 만주족이 중국왕조의 실질적인 계승자임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한당송명의 '도통(道統)'과 의리는 문명국인 조선만이 이어 받았다고 보았다. 그러니 소중화는 자주성의 발로가 아니며 오히려 인종차별적인 우월성의 표현일 뿐, 조선이 청제국의 속국으로 사대-조공질서를 지켜야한다고 본 것이다. 거기다 일관적인 것도 아니었는데 소중화를 주장하며 조선을 유일한 문명세계라며 북방민족을 오랑캐 취급했으나 정작 외세의 침략이 시작되자 통상거부 명분으로 속국타령을 하던것도 위정척사파였다. 척사파의 대표적 인물인 최익현은 청의 속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뜻하는 대한제국 설립을 강력하게 반대했으며, 다른 위정척사파 유생 유인석도 "이미 대명제국의 황제가 있으니 천하의 두 황제가 있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와 칭제에 반대했다. 그런데 의병대가 해산된 뒤 유인석은 >“중국에 가서 [[원세개]](袁世凱)에게 원병을 청해도 크게 잘못될 것은 없다. > >또 우리 사람 1만 명이 사는 요동(遼東)에서 군사를 양성하면 크게는 온 무리를 바로잡을 것이요, 적게는 중화의 명맥을 보존할 것이다.” > >( 원용정, ‘의암유선생서행대략’(독립운동사자료집1)) 과 같이 앞의 주장과 양립되지 않는 말을 했다. 쉽게 얘기하자면 대명제국의 정통성을 받드는 사람이 대명제국을 무너뜨린 청나라의 지원을 받아 중화(= 대명제국까지 이어져 내려온 중국의 문화)를 유지하자는 말을 한 것. 문제는 이미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크게 패한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심지어 요동에 조선인 1만명이 산다는 이유만으로 그곳에서 군대를 양성해서 소중화의 이상을 실천하고 그게 잘 안되면 그 가치관을 보존한채로 있을 수 있다는 건데 전자는 나라를 망치는 짓이고 후자는 자연히 도태되어 사라지게 되기 때문에 어느 쪽이고 미래가 없다. [[https://sillok.history.go.kr/id/kza_13410020_008|유인석이 고종에게 올린 상소문 내용]] 또한 유인석이 원병을 요청하기를 원했던 [[위안스카이]]는 임오군란 이후 파견되어 12년간 조선을 기존의 명분적 속국에서 각종 이권을 침탈하여 실질적인 속국으로 만들려고 시도한 사람이다.[* 이와 관련되어 가장 좋은 예시가 조선대국론(朝鮮大局論)인데 위안스카이는 여기서 “조선은 본래 중국의 속국이다. 중국을 버린다면 어린아이가 부모와 떨어져 다른 사람의 보살핌을 받으려는 것이다.”라며 조선을 자국의 영향력 안에 넣으려 시도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4001349#home|위안스카이 협박, 조선 근대화의 황금 기회 봉쇄하라]]] 결과적으로 유인석은 실제로 요동으로 갔으나 청나라 측에 의해 의병을 해산하게 되었다. 어쨌든 양측 모두 기본 골자는 '중국이라는 제국이 이미 존재하는데 굳이 새로운 제국이 있을 필요는 없다.'라고 주장한 것. 결국 이들이 지키려던 것은 나라가 아니라 성리학 그것도 자기 학파의 세계관에서 존재하는 화이질서의 수호였지 조선왕조의 종묘사직도 아니요 대한제국의 자주권도 아니다. 또한 신분제에서도 경직된 면모를 보였는데,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자 척왜양창의를 내세우며 2차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위정척사파는 이들을 의병을 사칭하여 향촌사회를 약탈하고 자신들의 향촌지배권에 반대하는 폭동이 다시 일어난 것으로 간주하며 제거의 대상으로 보았다.그래서 민보군을 조직하여 조선 관군과 심지어는 일본군과도 협력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동학농민운동이 실패했는데도 이들은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는데 몽둥이로 때려죽이거나 산 채로 불태워 죽이는 것은 물론 화적죄로 몰아서 생매장하기도 했으며 관리가 귀순한 동학농민군들은 죄를 묻지 않기로 했는데도 색출해서 죽이며 토지문서를 약탈해 가기도 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엄연한 외세이며, 제국주의 침략국인 일제와도 손을 잡은 것이다. 이미 일본은 침략 의지를 드러냈는데도 이를 등한시하거나 외면하다가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겪고 나서야 부랴부랴 의병을 조직해 저항하기 시작한 것을 보면 변명이 안 된다.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한 이들은 동비[* 동학을 사칭한 도적무리도 있기는 있었으나, 그렇다고 무조건 동비로 몰았다는 게 잘했다는 건 아니다]라 불렸는데 이 시기에 이들도 의병이 되려고 했다. 문제는 해당시기 의병장들은 대개 양반이었고 이들은 "어딜 동비 따위가!" 라며 안 받아주기 일쑤였다. 의병내부에 있던 동학도들도 색출해서 죽여버렸다. 이때 살아남은 동학세력들은 송병준, 이용구가 만든 일진회로 들어가서 의병들을 공격했다. 이들 위정척사파 민보군은 1894년 이후 정치적 입장차이로 분열하기도 했는데 반외세를 외치며 의병으로 활동하는 세력이 있는가 하면 기득권 유지를 위해 반의병 활동을 하는 세력도 있었다. [[단발령]]으로 인해 의병활동이 벌어지던 때, 이항로 학파에 속한 의병장 [[유인석]]은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고 항의하던 [[김백선]]을 참살했는데, 문제는 유인석이 이끄는 의병대의 숫자는 3천~1만으로 앞섰고 김백선이 이끄는 의병대는 고작 4백명이지만, 전자는 훈련이 안된 소작농이나 근처 평민&천민들로 머릿 수만 많았던 민병집단이지만 김백선의 의병대는 포수들이 대부분인 정예병으로 일본군이나 관군도 위험시하던 부대였다. 이들의 수장이 싸우다 죽은 것도 아니고 같은 의병장에게 상민이 칼을 들고 항의했다는 이유로 죽었기에 결국 의병대가 해산된다는 결말이 나고 말았다. 나라가 흔들리는 와중에도 이미 신분에 얽메여 나라를 위해 헌신한 애국자를 위와 같은 이유로 죽여버린 시점에서 위정척사파 전체가 그러지 않다하더라도 위정척사파가 마냥 흠 없는 애국자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 셈이 되었다. 또한 이들은 임금의 명령보다도 성리학을 지키는게 훨씬 중요하다고 행동했는데, 대표적으로 을미의병을 들 수 있다. 을미의병의 궐기 명분은 대의적으로는 [[단발령]], 정확히는 이로 인해 효를 어기게 되는 것인데 이는 단순히 [[신체발부 수지부모]]에 있는것이 아니다. 애초에 양반들도 사람이라 상투가 너무 덥기 때문에 속알머리를 밀고 트는게 보통이었고, 백성들도 더우면 그냥 머리를 적당히 깎고 다녔다. 상투를 틀지 못하는 것은 부모상을 치루는 상주나 백정같은 천민으로, 전자는 부모를 지키지 자책감 때문에, 후자는 그냥 사람 취급을 못받아서라는 이유였다. 적당히 머리를 깎는 정도까지는 암묵적으로 허락되던 건 암묵적이라 그런건 쳐도, 엄연히 임금이 명령한 행위인데도 불구하고 심지어 그 '''임금이 솔선수범해서 단발령을 직접 수행했는데도 단발령을 따른 지방관을 목을 베어 효수를 하는것은 이 당시 위정척사파가 국법과 임금을 도대체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이들이 유교적 도덕성 회복 사회개혁을 주장하였으나 기껏해야 '수신(修身)하면 된다.', '내부 단속을 해야한다.', '더 격렬하게 거부해야 된다'는 미래가 없는 대책을 내놓았을 뿐, 정말로 조선 사회에 필요했던 개혁이나 외부 문물은 무조건 배척하여 유인석은 신학교와 여학교, 무관학교 설립을 거부했고, 최익현은 의회 설립 운동을 주도한 독립협회의 활동을 반대했으며 대한제국의 학부대신이었던 신기선은 언문을 없애고 한자만 써야하고 내각대신이 국정을 논하는 것은 군주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며 양복을 입지 말고 한복만 입어야 한다는 시대착오적인 주장을 했다.[[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jh&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jh_011r_0020_0010&position=-1|#]] 그리고 내놓은 대책도 제대로 된 건 아니었는데, 최익현의 상소대로 고종이 친정하자마자 청전 유포를 금지하자 조선 재정은 파탄이나고 '''백성을 위해 청전 유통 금지'''[* 지방관들은 상평통보로 세금을 걷어서 청전으로 한양에 송금 했기에 조정에는 청전만 가득했고, 청전 혁파하자 당시 조선 재정은 완전히 몰락했고 이후로도 회복되지 않았다.] 했다가 재정난으로 백성들의 생명줄인 바로 환곡을 털어먹는 대참사가 벌어지고 말았다.[* 청전은 조선 숙종 시기 부터 중국에서 들여와 유통이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조선 내 구리 생산량이 처참한데다가 유교 이론에 때라 광산 개발도 지지부진하고, 주 수입선이던 일본과의 교역도 끊겨서 민간에선 수요에 비해 동전이 공급량이 만성적으로 부족했다. 그덕에 탐관오리들도 이 교환비를 이용하여 막대한 차익을 누렸고, 민간에서도 쌀과 베의 물물교환 교역이 성행했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 뿐이 아니라 조선상인들도 중국에서 구리 값이 싸니 구리 동전을 사와 자체적으로 유통 했고 청전은 나름대로 구리 함량과 크기가 상평통보보다 2분의 1내지 3분의 1에 불과 했기 때문에 민간에선 상평통보의 절반정도의 가치로 교환되는게 보통이었고, 당백전 당오전 따위처럼 일단 재정을 확보하자고 실제 가치보다 과장된 가치를 지닌 돈을 대량으로 풀어놓는 것보다는 양반이었다.] 이들의 척화 대책이란 것도 의리만 있으면 몽둥이로도 진나라 초나라의 갑옷입은 대군을 물리친다는 의려제도(義旅制度)라는 민병대 양성안에 그쳤다. 그나마 냉병기로만 다투던 시기라도 정신론으로만 이기는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아무리 장비가 좋아도 싸울 마음이 안들면 제대로 못 싸우는게 당연하고 사람의 성질상 긍정적인 감정보단 부정적인 감정이 퍼지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이때문에 수성전같이 유리한 환경이면 몰라도 야전같은 경우는 장비나 훈련의 차이도 있지만 무엇보다 사기가 중요했다. 당장 [[팽성 대전]]에선 수적으로 훨씬 우위였던 한나라 연합군 56만이 초나라군 단 3만에게 패배한 전적이 있다. 훈련이나 통솔권에 대한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결과적으로 전열이 빠르게 무너진데서 사기가 극명하게 벌어졌고 이후 제대로 싸울 생각도 못하고 군대가 무너진게 패착이었다.] 제대로된 화기까지 도입되기 시작한 이 시점에서 정신론을 들먹인다는 것 부터가 사실상 유용한 방책은 없다고 스스로 증명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이 당시 조선의 기술은 16세기 홍이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수준인데 서양에선 이미 백색화약에 포도탄, 파열탄, 직사포 조준장치, 후장식 강철대포등이 나오던 시기로 홍이포는 그저 박물관 유물 취급해도 이상할게 없는 수준으로 격차가 벌어져있었다. 실제로 동학농민군 10만명이 조선 관군의 [[개틀링 기관총|회선포(回旋砲)]]에 인간 표적이 되기 바빴다는 엄연한 사실도 존재했다.]간단하게 말하자면 [[일본군]]이 예찬하던 정신론의 판박이다. 물론 우리가 다 알다시피 정신력만 외치던 일본군은 러시아, 중국을 상대로는 매우 고전했고 진짜 강한 적인 미국에게는 압도적으로 패배했다. 정신론도 서로의 군사적인 체급이 맞는 상태에서, 그것도 고대로 갈수록 먹히는 이야기인데 이 시대는 화기가 매우 발달하고 있던 시대였다. 기관총 하나만 있으면 수백의 군대로 원시 부족 군대 수만을 쓸어버리는게 이 시대였다. 또한 '비싸고 다양한 물품을 만들 수 있는 열강과 달리 조선은 수출할 수 있는 품목이 벼같은 비싸지도 않고 많지도 않아 섣부른 외교는 외국의 경제간섭의 빌미를 줄 수 있다.'라는 주장은 얼튿보면 맞는 말 같지만, 실제 경제사학 연구에서는 개항이 어떤 형태로든 간에 조선의 경제 성장을 자극했다는게 중론이다. 흔히 생각하는 개항 직후 교역은 '일본이 쌀을 싸게 사가고 공산품을 비싸게 파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제 값 주고 거래했다. 애초에 당시 일본은 그런 되도 않는 거래를 강요할 처지도 아니었고, 일본 상인들에게 물건 팔던 조선 상인들은 적자 보면서 일본에 물건을 팔아주는 자원봉사자가 아니었다. 다만 도시화 중이던 일본은 쌀 값이 폭등했고 영국의 면포가 들어와 면포 값은 싸진 반면, 조선은 도시와 공업이 미발달하여 쌀 값은 싼데 면포 가격은 목화 재배지의 감소로 인해 폭증한 상태였기 때문에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거래가 됐을 뿐이다. 이전까지 조선은 오직 농사만 짓다보니 쌀의 만성적인 공급과잉으로 쌀의 가격이 폭락해서 농민과 지주들이 자체적으로 생산을 줄이느라 생산성이 되려 낮아지고 있던 상태였는데, 개항 이후 쌀값이 높아지자 농민들이 다시 쌀농사 짓는데 투자를 늘여서 생산성이 늘어나는 현상까지 벌어졌다. 위정척사파의 주장을 두둔하는 사람들은 위정척사파들과 같이 경제가 성장하지 않을 것이란 전제를 하고 논리를 전개하나, 개항장의 무역으로 자본을 축적한 조선 상인들은 후에 조선의 민족자본가들로 성장하는데 성공했다. 신석기문명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호주 원주민 아보리진도 중국 상인들과 해삼무역을 했고, 시베리아 원주민들도 중국과 러시아 상인을 상대로 모피 무역을 하며 총기 소금과 의류등을 보충했었으며, 일본도 개항 초기엔 불평등조약으로 서양열강들에게 관세자주권을 박탈당했고 청일전쟁 승전후 영일동맹을 앞둔 1899년이 되어서야 영국에게 최초로 자주관세권을 인정받으며 이후 이를 빌미로 협상을 거듭한 19세기에 와서야 열강에게 뜯겼던 관세자주권을 전부 회수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조선은 이홍장의 배려로 서양과의 수교 조약에서 처음부터 관세 자주권을 흭득했다. 또한 "서구열강이 조선에서 얻을 무역 이익을 탐했다"라는 위정척사파들의 주장도 비판할 수 있는데, 조선의 특산품은 쌀처럼 부피만 크고 부가가치는 미미하며 그렇다고 조선을 판매 시장으로 삼기엔 시장이 너무 작았다. 일본 제국과 청나라가 조선을 노렸던 것은 무슨 경제적 이익이 있어서가 아니라 지정학적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큰 대가를 치르고 조선을 먹은 일본은 해방되는 그 순간까지 적자만 봤다. 대만총독부는 일본과 기후가 달라 설탕을 중심으로한 열대작물 플랜테이션으로 큰 재정흑자를 보고 일본중앙정계에서도 사랑받았지만 [[조선총독부]]는 뭘 할 수 있는게 없고, 해방되는 그 순간까지 대규모 적자를 내고 있었다. 총독부가 그 적자 벗어나보겠다고 [[산미증식계획]]으로 쌀농사를 해서 적자를 좀 극복했는데 기후가 똑같다보니 재배종도 똑같아 일본쌀값이 폭락해서 일본농림성 장관이 내각회의에서 [[조선총독부]] 대표만 보이면 얼굴 붉히면서 고성을 질러대면서 이러다 농민폭동 일어난다고 반발해 결국 [[산미증식계획]] 자체가 흐지부지되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위정척사파는 서양열강은 일방적으로 배척하는 근시안적인 면모를 보였으며,오히려 금수 취급한 서양과 일본 대신 그나마 오랑캐이며 상국으로 종주국으로 인정한 청나라는[* 유인석의 의병부대에서 활동했던 서상철은 동학농민봉기 시절 전라도에서 동학농민군을 모집하면서 " 천하의 대세를 논해보더라도 위대한 청나라는 100년동안 중화를 지배한 종주국으로 우리 종묘사직이 섬기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청나라를 배신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니 의리에 이어 어찌 밝다고 하겠습니까?[[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jh&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jh_001r_0040_0060&position=-1|#]] 라는 내용의 글을 돌린 적이 있으며 "청나라는 우리 조선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싸우고 있으니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힘을 합쳐 왜적을 쳐부수자."[[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jh&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jh_001r_0050_0050&position=-1|#]] 라는 글까지 발견되기도 했다.] 유일한 대외관계 대상으로 인정했으나 청나라는 조선이 개항을 미적거리고 일본의 강제개항에도 개혁을 미적거리자 다른 나라들과 관계를 맺도록 주선하였다. 그리고 위정척사파는 상소를 올리며 [[국제법|만국공법]]을 인용하였지만, 국제 사회는 힘으로 결정되는 사회였기 때문에 본질적인 부분을 모르는( 혹은 거부하는) 위정척사파들은 한계를 보일 수 밖에 없었다. 붕괴하고 있는 조선을 어떻게든 구해보려는 노력과 선의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기득권층임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개혁을 거부하고 현 체제를 유지하기에만 급급했기 때문에 역사적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