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진남북조시대 (문단 편집) === 중세 통일중국의 밑바탕 === 전근대적 사학계 시각에서 위진남북조시대는 어떻게 하면 망하는가, 통치자는 뭘 해선 안 되는가 하는 [[반면교사]]의 향연이다. [[육조시대]]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강남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할 때나 문화사적 시대구분으로 주로 쓰인다. 이 시기에 주로 강남에서 중세적인 귀족 문화가 발달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부터 시작하여 수나라의 천하통일 전까지, 369년에 다다르는 이 시대는 여러모로 중국의 흑역사다. 지나치게 잦은 전쟁과 [[소빙하기|소빙기]], 북방 유목 민족의 침략으로 예로부터 중국의 중심이었던 [[화북]]은 걸레가 되도록 털려서 인구가 반토막이 나버렸다. 그 대신 강남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계기는 되지만, 중국의 인구는 [[8세기]] 초ㆍ중반이 되어서야(당 현종) 다시 한나라 전성기 때의 숫자인 5천-6천만 명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현대 사학계는 자국, 외국 할 것 없이 이 시대에 비상한 관심을 보인다. 중국인은 예전 제국이 멸망하면 다음 제국이 들어서서 그 자리를 대신함이 자연스럽고 타당하다고 여기는 역사 인식 경향이 있어 예전에는 이 시대를 일종의 '''[[흑역사]]'''로 취급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런 정통론의 [[도그마]]가 무너졌으며, 중국의 역사는 수많은 이민족과의 관계 속에서 나왔다는 것이 대체적인 관점이다.[* 현대 이전 중화사상에 기반한 중국사의 정통론은 간단히 말해 <한족이 중국사의 정통>이고 <중국의 역사는 정통성을 가진 통일제국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짐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중국의 혼란기를 틈타 성립된 이민족 왕조, 대표적으로 오호십육국 시대의 <침투왕조>들은 '한화되어 그 정체성을 상실함으로써 중국사에 흡수되었다.'는 것이 중국사적 정통론의 관점이다. 반면 <호한체제>와 같은 새로운 관점은 중국의 역사와 그 정체성 자체가 수많은 이민족들과의 '''융합''' 을 통해 탄생한 것이지 어느 한쪽이 정통이라 나머지를 흡수한 것이 아니며, '하나의 통일왕조가 무너지면 그 정통성을 이어받은 새로운 통일왕조가 뒤를 잇는다.'는 유교적 정통론은 당대인들의 관념일 뿐, 역사적 사실에 정확히 부합하는 설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관점이다.] 여기에 따르면 북중국에 이민족 국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이 시기에는 특별한 가치가 있다. 국제적으로는 서양의 사학자들이 이 시대를 처음으로 주목했다. [[로마 제국]]의 반쪽인 [[서로마 제국]]이 쇠락한 끝에 멸망하더니, [[유럽]]이 여러 민족과 국가로 나뉘어서 몇 번의 통합은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거대한 전쟁을 수차례 치르면서 오늘날 각각의 국가로 분리된 역사적 경험이 있어서였다. * [[한나라]]와 [[로마 제국]]은 고대 말기에 탄생하여 '명확하게 기록된' 역사 시대의 초기를 연 제국으로서, 이전까지 [[중국|단일 문화권이라고]] [[유럽|보기 힘들었던 영역]]을 통합하였으며 '중화 문명권'과 '지중해 문명권'의 기반을 닦았다. 언어와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영향력으로 인해, 이후 탄생한 국가들은 어떤 의미에서든 두 제국의 계승자임을 강조함으로써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시도했다. * 두 제국 모두 상당히 긴 시간 동안 번영하며 사회적, 문화적 기틀을 완비하였으나, 결국 축적되는 내부 모순과 외부(이민족)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붕괴하였다. 그러나, 이 붕괴는 제국의 완전한 멸망에는 이르지 않았고, 이전 시대의 심장부(수도였던 로마와 낙양/장안, 또는 보다 넓게 보아 이탈리아와 사예 지역(중원)을 상실했음에도 [[동로마 제국|제국의]] [[남조#s-1.1|일부]]는 살아남아 제국이 이룩한 문화를 보존하고 후세에 전달했다. 살아남은 제국의 일부는 분열 초기에는 할거 세력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제국의 재건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고, 종국에는 제국이 상실한 영역에서 성장한 세력들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 이와 같은 공통점을 가졌으나 '''[[수당교체기|당대 희대의 대사건]]'''을 통해 분열 수습에 성공한 중국과 달리 유럽은 결국 분리의 길을 걸었다. 따라서 유럽의 사학자들은 왜 중국은 이 시대를 거치고도 다시 [[천하통일|통일]]되었는지 관심을 가졌다. [[https://www.youtube.com/watch?v=7jyitbvtucE|#]][[https://www.youtube.com/watch?v=3clQO68INnE|#]] 위진남북조시대의 의미가 남다른 이유는 [[진시황]]의 통일 이후로 중국 대륙이 이 시대처럼 수백 년에 걸쳐 분열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분열기와 다르게, 수백 년간 분열한 경우는 이 위진남북조 시기뿐이었다. 유럽과 달리 중국은 이렇게 장기간 분열해 있었음에도 결국 통일을 이룬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중국의 역사, 중국인들의 국가 관념과 정신사를 파악하기 위해서 사학자들이 위진남북조시대를 연구하게 된 것이다. 위진남북조시대의 분열기는 장장 369년이다. [[서진]]이 일시적으로 통일한 시기를 빼더라도 332년이고, 진한시대 400여년에 거의 필적하며, [[오대십국시대]] 이후 들어선 [[북송|통일]] [[명나라|왕조]][[청나라|들]]의 존속 기간보다도 더 길었다. 이는 한나라가 구축한 사회 구조가 완전히 무너지기에 충분한 시간으로, [[서로마 제국]] [[라벤나 함락|멸망 이후]] 서유럽이 빠져든 대혼란과 분열 상태에 비교할 만하다.[* 이러한 유사성 때문에 중국의 [[중세]]는 (굳이 구분한다면)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 혹은 [[오호십육국시대]]부터 시작된다고 본다. 참고로 유럽 중세의 시작은 서로마 제국 멸망 시점으로 여겨진다.] 중국 역대 통일 왕조들의 전통은 실질적으로 [[수당시대]]를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는 극단적인 관점[* 주로 [[고대 로마]]와 연계하는데 치중하는 서구의 관점이다.]도 있다. 한나라가 [[중국사]]와 중국 통일 왕조들의 전통에 끼친 영향력을 생각하면 이런 관점은 분명 극단적이지만 살펴볼 가치는 있다. [[한나라]] 멸망 이후 [[수나라]]라는 통일 왕조가 나타나기까지 400년에 가까운 기간은 한이 확립한 통일 제국의 기반이 완전히 해체되기에는 충분한 기간이었다. 수당 왕조가 한의 유산을 일종의 청사진으로 삼았지만 그 체제 자체를 계승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이는 그 이후의 통일 왕조들이 역대 중국 통일 왕조 가운데 정부 조직의 완성도가 가장 낮았다고 평가 받는 [[원나라]]를 제외하면[* 단 원나라로부터 계승한 것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단적으로 오늘날까지 쓰이는 중국의 지방행정구역 성(省) 역시 이때 들어온 것이다.] 전 왕조의 체제를 계승하여 정착한 것과 분명 다른 점이다.[* 한나라 시대의 문화적 전통이 이후의 통일 왕조들에게 끼친 '''영향력'''은 분명 존재하지만, 정치사의 관점에서 권력 기구와 제도 계승은 당나라 이후부터 이루어졌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당나라 멸망 이후 맞이한 [[오대십국시대]]는 지방 세력이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하고 중심부에서도 왕조가 여러 차례 바뀌었으나 위진남북조시대처럼 혼란이 장기간 고착화되지는 않았고, 송이 통일 제국의 위치를 계승하였다. 원을 몰아내고 탄생한 명의 경우 군벌들이 난립했음에도 분열기를 거치지 않고 통일 제국으로 성립하였으며,[* [[주원장]]이 군벌들을 정리한 다음에 원나라를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이는 이후 [[만주족]]의 정복 이후 청으로 이어졌다.[* [[만주족]]의 [[청나라]]도 [[이이제이]]를 상당히 잘 활용했다.] 이런 점에서 위진남북조시대는 통일 제국 멸망 이후 오랜 분열을 거쳐 재통합을 이룬 뒤 장기적인 통일 제국의 형태를 완성했던 것이다. 한편 중국 사학계 역시 이 시대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현대에 중국 내 소수 민족 문제가 불거짐에 따라 변방사나 이민족 유입의 역사 등에 관심이 높아졌고, 그 첫 단추가 [[오호십육국시대]]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현대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은 [[공산주의]]의 국제주의 원칙에 입각해 스스로를 중국 땅에 사는 여러 민족의 다민족 국가라고 공표한다. 따라서 중국사는 한족 외의 민족들의 역사도 포함되는 것이다.[* [[동북공정]] 역시 이 논리대로라면 중국 내 조선족들의 역사도 중국사이므로, 현재 중국 땅에 있었던 고구려, 발해 역시 중국 조선족의 역사로서 중국사에 들어간단 주장이다.] 중국사의 이민족 왕조들은 대개 '정복 왕조'로 취급받지만 이 시대의 이민족 왕조들은 '''침투 왕조'''[* 학계에서는 한족을 지배하면서 이민족의 독자성을 유지한 [[요나라|요]], [[금나라|금]], [[청나라|청]] 등의 왕조를 정복 왕조라고 부르며, 오호십육국과 북위처럼 한족을 지배하면서 독자성을 잃고 한족에 흡수된 왕조를 '침투왕조'라 부른다. 그러나 침투왕조 이론은 호한체제라는 개념에 도전을 받고 해체 국면에 들어갔다. 한국 사학계가 주장한 이론 중에 드물게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이론이 바로 호한체제(胡漢體制, Sino-Barbarian Synthesis)이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명예교수인 박한제 교수가 1988년 발간한 '중국중세호한체제연구'는 중국 중세사의 바이블로 취급된다. 호한체제에 관해서도 국내에 박사-교수급 학자 10여 명이 연구에 매진한다. 다만 이 학설이 주도설의 위치는 점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부른다. 이들의 씨족 중심적이고 분권적인 전통이 한족 왕조의 중앙 집권 제도와 융화되지 못하다가 아예 한화(漢化)되는 과정을 겪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양이나 중국 가릴 것 없이 이 시대에 관심이 높아졌고 연구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하지만 비교적 최근에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데다가, 이 시대는 워낙 자료가 적고 복잡한지라 어려움이 많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