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고슬라비아 (문단 편집) ==== 외부적 요인 ==== 2차대전과 그 이후에 유고슬라비아가 분열되는 원인이 내부적 모순 뿐 아니라, 외부적 요인 또한 강하게 작용했음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외부적 요인이란 당시 유고슬라비아를 위협하던 외세인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이다. 당시 독일은 유고슬라비아를 점령하는 동안 오늘날의 크로아티아 공화국과 보스니아 일대에 [[우스타샤]]가 주도하는 [[괴뢰국]]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세웠다. 중요한 점은, 당시 우스타샤는 이전부터 이탈리아로부터 암암리에 지원을 받아 유고슬라비아에서 사보타주를 일으켜 오다가 탄압을 받아 해외로 쫓겨나고, 지도자 [[안테 파벨리치]]는 이탈리아에서 신변보호를 명목으로 사실상 감금 상태였다.[* 우스타샤는 국왕 알렉산다르 1세의 암살사건의 배후였고 이후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다.] 이로 인해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성립될 당시에 우스타샤는 유고내 크로아티아 주민들 사이에서 '''정치적 기반이 거의 없었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크로아티아 독립국가의 염원이 이루어지자 수 많은 크로아티아계 주민들이 이에 열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스타샤가 급격하게 폭주하기 시작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 내에서 크로아티아계 민족주의 운동의 대표는 원내 정당인 크로아티아 농민당이었다. 이미 크로아티아 농민당은 섭정 파블레 왕자와의 타협을 통해 왕국 내 크로아티아 자치지역인 크로아티아 바노비나의 설립을 이끌어 낸 바 있었다(1939).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가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지도세력으로 주민들의 지지를 받는 종전의 크로아티아 농민당이 아니라, 자생적 기반이 없는, 과격 테러단체인 우스타샤를 고른 이유는 간단했다. 추축국이 원한건, '''크로아티아계 주민의 이익과 권리를 대변하는 단체가 아니라,''' (자생적 기반이 빈약함으로) '''외세에 의존하고, 추축국의 전쟁수행을 지원하는 꼭두각시 괴뢰정권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우스타샤는 잘 알려진 대로 보슈냐크계 무장조직인 [[한트샤르]]와 함께 세르비아계 주민을 대상으로 인종 청소에 나서 수십만을 '''나치조차 기겁할 만큼 잔혹하게 학살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 왕당파인 [[체트니크]] 역시 이에 맞서 크로아티아계와 보슈냐크계를 대상으로 수십 만을 학살했고 이후 사이좋게 티토의 파르티잔에 박살난다. 사실 2차대전 이전의 유고 및 보스니아에 사는 세 민족(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보스니아인)은 주도권을 차지하려 서로간에 불편한 감정과 갈등이 있을지언정, 적어도 서로를 '''말살해야 할 원수'''로 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치 정권에 의해 괴뢰 정권이 세워진 후 자행된 '''인종청소가 모든 것을 바꿔놓았고, 크로아티아계, 보슈냐크계, 세르비아계의 트라우마로 깊이 각인되었다.''' 티토의 연방공화국 시절에는 '우애와 단결'(Bratstvo i jedinstvo)이라는 구호 아래 이러한 트라우마는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는 듯 했다. 하지만 티토 사후에 점차 세르비아계는 크로아티아계와 보슈냐크계의 자치 운동에서 '''우스타샤와 한트샤르의 그림자를''', 크로아티아계와 보슈냐크계는 세르비아계의 주도권 확대 노력에서 '''체트니크의 그림자를''' 보면서 민족 갈등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달리 말하자면, 당시의 외세의 영향과 간섭을 극복할 만큼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내부가 충분한 결속력을 가지지 못했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다만 2차 대전 당시 외세의 개입과 영향이 유고슬라비아 국민들에 악몽과도 같은 경험과 기억을 남겼고 이 트라우마는 유고슬라비아 각 민족들의 기저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아 '''내전과 인종청소가 재현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