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관순 (문단 편집) === 과대평가 근거 === 유관순이 훌륭한 활동을 한 건 맞지만, [[3.1 운동]] 당시와 그 이후로도 수십 년간 무명의 참가자였다. 1945년까지 발행된 모든 신문기사에서 유관순의 이름은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다. 오히려 여성 독립운동가 중 1920~30년대 [[근우회]]나 여성동우회 등 활발한 활동을 하며 당대 이름이 알려졌던 신여성 엘리트들이 많다. 유관순은 1947년부터 갑자기 국내 신문에 자주 등장하며, 영웅 서사를 갖게 된다. 그러나 유관순은 해방 이후 '''누군가의 적극적인 발굴'''에 의해 '''순국의 아이콘'''이 된다. 1946년, [[이화학당]] 출신의 [[박인덕]][* [[인덕공업고등학교]]와 [[인덕대학교]]를 설립한 교육자.]과 이화여중고 교장 [[신봉조]][* [[이화여자고등학교]] 최초의 [[한국인]] 교장이자 [[남자]] 교장. [[이화여자대학교]] 최초의 한국인 교장(총장)은 [[김활란]]이다.]는 이화학당을 알릴 인물을 찾는다. 신봉조가 박인덕에게 “[[이화학당]] 출신 중 국가와 민족에 공헌한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박인덕이 [[3.1 운동]] 때 순국한 유관순을 제안하면서 비로소 유관순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두 사람은 유관순을 널리 알리기로 하고, 유관순 기념사업회를 구성한다. 그런데 많은 항일 학생운동가들 중에서 유독 유관순이 선택된 배경에는 이들이 자신의 친일행위를 덮으려는 목적이었다는 의혹이 있다. 신봉조는 일제 말기에 전형적인 친일파 노릇을 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에 간부로 참여하여 [[한국인]]을 일제가 벌이는 전쟁터에 내보내는 데 앞장섰다. 박인덕도 대표적인 신여성이자 엘리트였지만 마찬가지였다. 해방 후 그들은 자신들의 수치스런 친일 경력을 가릴 방패막이가 필요하였다. '''[[이화학당]] 출신의 애국자를 발굴해''' 크게 부각시킴으로서 자신들의 죄과를 덮으려 했고, 그에 딱 알맞은 인물로 유관순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유관순을 실제 이상의 영웅으로 신화화하는 데 몰두한다. 박인덕도, 최초로 유관순의 전기를 쓴 전영택도 유관순을 조선을 구한 [[잔 다르크]]로 표현하면서 유관순을 신통한 능력을 가진 신화적인 존재로 승격시켰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과대포장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3.1 운동]] 당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대략 7,500여 명이다. 유관순 열사 역시 운동을 이끌다가 옥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유관순 열사의 상징성을 강조하느라 다른 열사들은 조명을 받지 못했다는 것. 나머지 7,500여 명의 열사들이 희생을 당했다는 것도 후세에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박은식의 주장 외에 일본 측의 기록을 보아도 3개월간의 진압과정에서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구금자 46,948명으로 나온다. 유관순은 저 중 사망자 혹은 부상자가 아닌 구금자 46,948명 중의 한 명인 것이다. 유관순이 사망한 것은 일제의 3.1운동 진압과정이 아니라, 감옥에 수감된 1년 6개월 후인 1920년 9월 28일이다. 유관순이 훈장을 받는다면, 그에 앞서 3.1 운동 중 사망한 7,509명에게도 동급 혹은 그 이상의 훈장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이다. 7,509명의 사망자 안에는 유관순의 부모님 모두 포함되어 있다.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두 사람은 건국훈장 애국장(4급)을 추서하였다. 죽은 부모님은 4등급 훈장, 살아남은 딸은 1등급 훈장이다. 독립운동 과정 중 목숨을 잃은 사람보다 [[일본 경찰]]에 잡혀서 옥사한 사람에게 더 높은 훈장이 수여된 것이다. 유관순이 1심에서 받은 형량은 3년으로, [[민족대표 33인]]이 받았던 형량과 동일하다는 점도 지적되나, [[3.1 운동]]은 오히려 민족대표 33인보다 당시 현장에서 저항했던 사람들이 훨씬 높은 형량을 받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신교]] 출신이라는 점에서 당시 [[천주교]] 내 보수파는 '''"[[안중근]] 의사처럼 거물도 하나 못 죽였는데, 열교(개신교)들은 미화가 너무 심하고 우린 천주교 내 친일경력도 반성했다."'''라고 주장했다. [[불교]] 보수파 측은 '''"만해 [[한용운]] 선생은 독립운동을 한 것이 맞는데, 친일파라고 음해받고 불교의 독립운동사는 왜 말이 없고, 왜 기독교는 유관순 열사만 띄우냐?"'''라고 했다. 실제 4.1 아우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고 알려진 [[조인원(1864)|조인원]] 선생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데 반해,'''[* 아이러니하게도 조인원 선생의 장남이 그 유명한 '''[[조병옥]]'''이다. 아들의 유명세에 의해 묻힌 상황.] 유관순은 3.1 운동의 상징처럼 굳어져 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