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관순 (문단 편집) === 그녀와 달리 잊힌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 === 유관순보다 독립운동 경력이 긴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를 제치고 유관순이 여성 독립운동가의 대표격이 된 건 정치적 이유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화학당]] 1회 졸업생 중 한 명인 신마실라는 주활동지역이 [[미국]]이며 미주한인의 자금조달 등의 활동을 했지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이태영]]은 독립운동도 했고 심지어 국내 최초의 여성[[변호사]]이지만, 해방 이후 [[이승만]]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김마리아]]와 황애시덕은 독립운동과 더불어 민족계몽운동에 앞장 섰는데, 예를 들면 3.1 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에서 회장은 김마리아가, 부회장 겸 총무는 황애시덕이 맡았다. 한국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라는 소리까지 나오는 [[허정숙]]은 [[사회주의]], 그것도 [[마르크스-레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 광복 후엔 아예 [[북한]]으로 갔으니 내세울 수가 없다.(허정숙은 게다가 보수적인 [[일제강점기]]에 화려한 연애사로 입방아에 오르내린 여성이다.) [[주세죽]]은 3.1운동에 참여한 엘리트 혁명가인데 박헌영과 김단야의 아내라는 점과 빼어난 미모로만 알려졌다. 권애라는 3.1 운동 후 유관순과 같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후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는데, 심지어 남편이 [[의열단]] 단원 [[김시현(독립운동가)|김시현]]이다 보니, 해방 후 [[이승만]] 암살미수자의 아내를 추앙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김조이, 이애라, 최복순 등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고 현앨리스도 활발한 독립운동을 했지만, 사회주의 계열의 활동을 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백마 탄 여장군이라 불릴 정도로 [[조선의용대]]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한 [[김명시]] 장군도 알려지지 않았다. 김명시의 경우 광복 직후 유명세가 대단해서 백마를 타고 서울을 행진하자 서울시민들이 그녀를 알아보고 "김명시 장군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또한 [[경성트로이카]](=[[이재유]] 그룹)는 남녀 활동가 비율이 비슷한 독립운동조직으로 일제강점기 여성 최장기간 수감자인 [[박진홍(독립운동가)|박진홍]], 일제감시대상카드가 가장 많은 이순금, [[이효정(독립운동가)|이효정]], 이병희 등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언급된 독립운동가는 모두 1945년 광복 때까지 독립운동을 계속했으며 당연히 이들 여성 독립운동가 모두 잔혹한 고문을 받았지만 묻혔다. 이병희는 트로이카로 잡힌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고춧가루 물고문, 전기고문, 단근질을 통한 성고문 등을 당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즉 순결하고[* 신여성의 연애사 스캔들이 없어야 함.], 정치색이 없고, 기독교 집안이고[* [[이화학당]]이 기독교 재단], 20살에 장렬하게 죽어 까일 점이 1도 없는 유관순이 발탁된 꼴이다. 유관순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발탁된 과정에는 여러 정치적 고려가 있었다는 점, 1945년까지 변절하지 않고 투옥을 반복하며 독립운동을 했지만 지금 전혀 기억되지 않는 여성들도 많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만약 유관순이 살아서 1920~30년대 다양한 사회활동을 했다면 결코 지금 같은 애국 아이콘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1920년대 신여성엘리트로 활동했을 수도 있고, 1920년대 많은 조선 지식인들이 그랬듯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졌을 수도 있는데, 그랬다면 절대 지금과 같은 위상을 가질 수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