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관순 (문단 편집) == 여담 == || [[파일:attachment/유관순/유관순1.jpg|width=100%]] || ||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될 당시 찍은 사진 || * 생존했던 유관순의 [[이화학당]] 동창들이 “얼굴이 너무 다르다”며 지적하자 가운데와 오른쪽의 초상화가 그려진 것이다. 실제 인물은 청초하고 갸름한 [[얼굴]]이었다고 하니 감옥에서 받은 고초가 얼마나 심했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듯하다.[* 이 점은 사실 장우성 화백이 의도적으로 다르게 그린 것은 아니다. 애초에 영정심의위원회에서 흐릿하게 찍힌 이화학당 시절 [[사진]] 탓에 제대로 얼굴을 복원하기 어려웠던 나머지 투옥 시절의 사진을 통해 자문을 내려줬다는 점도 있었다. [[박목월]] 선생의 전기 등에서도 유관순의 [[한문]] 이름도 때로 기록이 서로 다른 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이후 공개된 3.1 운동 1년 전 사진을 보면 동일인임을 의심할 정도로 차이가 나는 얼굴은 아니다. 얼굴 윤곽이 동일한 것을 [[https://www.youtube.com/watch?v=SdjNdlMI4kU|확인]]할 수 있다. || [[파일:bafbaa43-8472-4676-940d-f732c5684c3b.jpg|width=100%]] || || 2019년 5월 21일,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이화학당 시절 유관순의 미공개 사진 2점을 최초로 [[https://mnews.joins.com/amparticle/23474362|공개]]했다. 위의 사진에서 왼쪽에 있는 색깔 있는 저고리를 입은 사람이 유관순이다. || [[파일:유관순 고화질.jpg|width=60%]] [[파일:유관순 고화질1.jpg|width=60%]] * 유관순이 [[징역]] 3년이라는 형량을 받으면서 정말 고문을 받았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일본 제국|일제]]의 법령에 따르면 [[여성]]은 법정최고형이 7년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사실 유관순은 징역 7년을 받고 들어간 것이었고 이것은 현대로 따지면 [[무기징역]]과 똑같은 의미라고 봐야 한다. 더군다나 당대 [[일본 제국]]은 근본적으로 [[인권]]을 보장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한국에서 ‘성고문’으로 떠들썩했던 건 1980년대 이전에 이미 1920년대 [[평양시|평양]]에서 그 사례가 있다. 게다가 당시는 일제시대 중 그나마 '''인권을 보장해주는 척'''이라도 하는 시늉을 했던 [[문화통치]]기도 아니었다.]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한 보통선거와 인권 신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실현된 것은 훗날 [[미군정]]기이다. 또한 당대 공판 기록 등을 볼 때도 사상범 [[부부]]가 같이 기소되는 경우 여자는 형집행정지로 나오는 경우도 무척 많으며 이런 점이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공훈 정리에 불이익을 주기도 한다. 그렇다고 여성에 대한 처우가 괜찮았다는건 결코 아니며 이런 식으로 법적으로 대놓고 혹은 암묵적으로 동일 [[범죄]]를 저질러도 여성에게 관대하게 판결을 내리는 경우는 전반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낮아 여성을 ‘보호’의 대상으로 보고 낮은 지위에 대한 배상책의 일환으로 존재했던 것이다. 사실 1920년대나 1930년대 초반의 [[신문]]을 보면 단순한 절도 내지는 참고인 조사 과정에서도 나체 고문 내지는 고문치사, 성적인 학대로 인한 자살 사례가 보도될 정도였다.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나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등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대일보, 중외일보 등 민족계 신문들을 검색해 보면 오히려 한국의 1980년대 이상으로 자세한 고문 고발 기사가 [[다이쇼 시대]]에는 버젓이 실렸음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신문에 잘 안 나거나 갑자기 [[사망]]식으로 은폐된 경우도 많다는 것을 보면 유관순에 대한 무서운 일은 일반적으로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조갑제]]의 회고에 따르면 30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도 경찰서에 고춧가루통을 가지고 가는 순경들이 많았다고 한다. * [[오만원권 지폐|5만원권]]에 들어갈 여성 인물로 유력하게 거론되었으나, [[신사임당]]에게 밀렸다. “얼굴이 퉁퉁 붓고, 수심이 가득찬 얼굴이라 고문 받기 전 사진을 찾기 힘들어서”라고 밝혔다. 유관순 외에도 [[김구]] 선생이 들어갈 10만원권은 아예 발행이 무기한 연기되었다. * 유관순의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도 만세를 불렀다는 건 비중을 별로 두지도 않을 뿐더러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없으며 부모가 모두 진압 군경의 총칼에 사망했음에도 잘 다뤄지지 않는다. 아마도 어린 소녀가 [[독립운동]]에 앞장섰다는 상징성 때문이리라 추측된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도 아우내 만세운동 부분에는 유관순이 아니라 진압 군경에 총에 맞고 팔이 잘리고 머리가 절단난 다른 남자를 주로 다루고 있다. 단, 여기서 같이 잡혀간 사람 중에 이화학당 출신의 학생이 있다는 기록으로 이게 유관순이라고 본다. 사실 유관순의 부친인 유중권은 사재를 털어 [[고향]]에 학교를 세워 교육 운동을 전개한 계몽운동가였다. 일찍 [[감리회]]에 입교한 [[개신교]] 교인이기도 하여 마을 유지들과 협력해서 교회도 세워 교육과 계몽 활동에 힘을 기울인 인물인데 유관순 역시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유중권의 장남이자 유관순의 오빠인 [[유우석]][* 1899~1968, 아명인 유관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또한 독립운동가로 [[공주시|공주]]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 투옥되었으며 공주지방법원 재판에서 유관순과 잠시 해후하기도 하였다. 유관순의 사망 이후에도 유우석은 활발히 항일투쟁을 벌였으며 [[독립]]을 본 후인 1968년 5월 28일 향년 70세를 일기로 자택에서 노환으로 소천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2010년 초,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초등학교 교과서 4학년에 수록된 유관순 전기를 삭제하려 했다가 다행히 유관순 관련 단체 및 여론의 반발로 삭제는 취소되었다. * 유명 인터넷 논객 [[김완섭]]은 2003년에 낸 저서 <새 친일파를 위한 변명>을 통해 유관순이 [[폭력]] 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했다며 '여자 깡패'라는 비난을 했다. 이에 유관순의 조카 유제우가 소송을 걸어 2011년에 대법원은 그가 유관순이 주도한 시위는 폭력적이었다고 하지만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와 유관순에 대한 판결문 및 번역본 [[http://e-gonghun.mpva.go.kr/portal/web/book/book_xml_view_detail.jsp?his_code=PV_DJ&book_code=A005&item_code=010.000.000.000&keyword=%EC%9C%A0%EA%B4%80%EC%88%9C#k2hl|판결문]]에 의해 '당시 시위는 평화 시위였음'이 확인되는 바 김완섭의 기술은 '허위 사실 적시'에 해당되어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700만원 [[벌금]]형에 처한다고 판결하였다([[https://casenote.kr/%EB%8C%80%EB%B2%95%EC%9B%90/2008%EB%8F%843120|2008도3120]]). 그러나 유관순이 ‘여자 깡패’라는 김완섭의 표현은 [[모욕]]적인 표현에 해당하지만 국내 [[형법]]상 사자 명예훼손죄는 있어도 사자 모욕죄는 없기 때문에 [[무죄]] 판결을 내렸다. * [[이화여자대학교]]에서는 유관순 동상 건립 운동도 일어나고 있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61471|#]]). 해당 기사에서 나오는 [[김활란]]은 스승이라는 도시 전설이 있는데 그녀는 이화학당 시절 [[선배]]로 유관순과의 나이는 5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녀도 [[3.1 운동]] 때 체포되었으나 이후에 [[친일파]]로 전향하여 맹활약을 하게 된다.] 실제 스승은 [[박인덕]]이다. 박인덕도 3.1 운동 후 여러 가지 활약을 했지만 [[일제강점기]] 말엽에는 당연히 친일의 길에 접어들었고 그것을 별도로 하더라도 고위층과의 연애 플래그나 [[세계]] 일주[* 당시 세계 일주는 [[일본인]]들도 하기 어려웠다.] 등으로 화제를 일으킨 여성이었다. 유관순이 각광받으면서 유관순의 스승으로 같이 인식된 건 [[친일반민족행위자]]이던 박인덕이나 여러 작자들이 자신들의 더러운걸 숨기고 유관순 찬양과 같이 지들을 미화하기 위한 게 컸다. [[http://www.antichrist.or.kr/bbs/board.php?bo_table=son&wr_id=867|#]] 실제 1990년대 어린이 위인전기에는 아예 박인덕을 주인공으로 한 스토리도 나왔다. 소설 [[화수분]]으로 유명한 소설가 전영택도 친일 행위를 하던 걸 숨기고자 유관순과 알던 사이라는 걸 늘 강조하며 자랑하기도 했다.[* 실제로 전영택의 <유관순 전기>는 박인덕의 증언에 의해서만 기록되었다고 공언하고 있으며 전기 내용 중 '관순이'의 영특함을 과시하는 대목에서 항상 질문하고 좋은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은 박인덕이다.] * [[개신교/대한민국|한국의 개신교]]계에서는 그녀를 개신교계 [[영웅]]으로 생각하나 그에 대한 반론도 있다. 그녀와 이화학당 시절 [[기숙사]] [[룸메이트]] 친구였지만 뒤에는 [[불교]]로 귀의하고 [[비구니]]가 된 보각스님이 회고하기를 알려진 것과 달리 짓궂은 면이 있었다고 한다. 유관순이 기도할 때 [[하나님]] 대신 명태님, 굴비님이라고 붙여 기도하며 킥킥거린다든지 친구들과 모여서 “[[예수]]님은 춥겠어. 벌거벗은 채로 늘 매달려 있잖아?”라는 말에 “뭐 그래야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겨 관심을 기울일 테니 춥다고 불쌍히 여길 것은 없어”라는 말을 했다고 하나 그녀의 [[나이]]가 어린 10대의 어린 소녀였음을 생각하면 지극히 정상적이고 또래다운 발언이다. 보각스님의 주장만으로 그녀가 신앙적이었다 아니다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역사]]적으로 밝혀진 사실만 보면 유관순은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고 그녀의 가족은 모두 [[개신교]] 교인이었으며 천안 병천면 지역의 감리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아버지 유중권은 사재를 털어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또한 그녀는 개신교 [[미션스쿨]]인 이화학당에 다녔고 서울에선 [[정동제일감리교회]][* [[이화여자고등학교]]&[[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다.]에 출석했으며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나 [[잔 다르크]]를 뽑았다.[* 물론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을 존경한다고 기독교인이라는 보장은 없다.] 보각스님의 회고가 전부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녀는 정기적인 [[신앙]] 생활을 한 개신교인이지만 짓궂은 면이 있었고 신앙 생활에도 딱히 예외는 아니었다 정도가 되겠다. 다만 보각스님의 회고 이외에는 딱히 근거가 없는 것이 문제. * 당시 [[이화학당]]의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 [[교복]]이 유관순의 상징으로 굳어져 흔히 [[유관순 교복]]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이 한복을 흔히 입는다고. [[http://www.rfa.org/korean/in_focus/ryu_nk-20080229.html|그러나 북한에서는 유관순 자체를 모른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애초에 해방 이후 유관순이 재조명된 것은 1947년 이후 남한에서만 한정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남한의 유관순처럼 중요시하는 여성 독립운동가는 첫 번째가 다름 아닌 국부 [[김일성]]의 아내 [[김정숙(북한)|김정숙]]이고, 그 다음이 [[허정숙]]이다. * 2014년 8월 [[한국사(교과)|한국사]] [[교과서]]에서 유관순이 누락된 것이 발견되었다. 이를 두고 언론 일각에서 국정교과서에 힘을 싣는 여론이 조성되기도 했다. 하지만,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extbook.do?process=main|역대 고교 국정교과서]] 모두를 확인해도 그 어느 책에도 유관순이 없었다. 확인해 본 바에는 6차교육과정에 ‘각주1 부분에 유관순 열사의 순국’ 부분 간략히 기술한 부분이 있긴 하다.[[http://contents.history.go.kr/front/textbook.do?process=view&recordId=kk_062_0040_0030_0010|#]] [[두산동아]], 금성출판사, 천재교육, 미래앤 4종의 교과서이다.[[http://news.nate.com/view/20140828n43110|#]][* 이 부분은 다소 설명이 필요한데, 유관순은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는 매우 비중 있게 다룬다. 중학교에서는 조금 약하게. 고등학교는 [[3.1 운동]]의 구조적 측면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는 측면이 있다. 이 과정에서 오해가 생기게 된 것.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정 국사 교과서에도 유관순은 실려있지 않다.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897552476924888&set=a.408536285826512.112769.100000104334973&type=1&permPage=1|천재교육 한국사 집필자인 주진오 교수]]의 경우처럼, 고등학교에서 유관순이 빠진 동일 저자의 중학교 교과서에는 유관순이 나온다.] * [[대한민국 해군]]은 [[2015년]] [[삼일절|3월 1일]] [[손원일급 잠수함]] 6번함의 함명을 유관순함이라 명명하였다. 여성으로는 최초로 한국 해군함의 함명으로 결정된 것이다. * 유관순의 [[이화학당]] 시절 친구로 2010년 4월 3일 106세의 나이로 사망한 남동순 할머니가 있는데, 유관순 열사가 사망한 이후 [[독립운동]] 단체[* 자금전달, 정보수집, 심지어 무장투쟁까지 했다고 한다.]에 들어가 활동을 했다고 한다. 심지어 1945년 8월 14일에도 작전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체포된 동료를 구하는 작전이었다고 한다.] 광복 이후에는 [[고아원]]을 세웠다. * 2015년 6월 서울게임아카데미에서 주최한 ‘게임 컨셉아트 공모전’에서 수상한 수상작이 유관순 열사를 성적 대상화한 것으로 밝혀져 뒤늦게 논란이 되고있다. [[http://sports.news.nate.com/view/20180115n26174|미니스커트 입은 유관순 열사? 게임 아카데미 수상작 논란]] * 2018년 3월 28일(현지 시간) [[뉴욕 타임스]](NYT)가 [[http://v.media.daum.net/v/20180330145133374|유관순 열사에 대한 부고기사를 총 8페이지에 걸쳐 게재했다.]][* 자사 부고기사를 분석한 결과 저명한 백인남성 위주였다며, 이를 반성하는 차원에서 지난 8일부터 ‘오버룩드’(overlooked·주목받지 못한) 코너를 마련했다. 매주 일요일 부고기사 지면에 게재되는데,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평가받지 못한 여성들 이야기를 다루었다. 유관순 열사가 재조명된 것도 그 일환이다.] * 유관순의 고향인 천안에 그녀의 이름을 딴 [[유관순체육관]]이 있으며 현재 [[V-리그]] 남자부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의 홈구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참고로, 유관순 열사의 동상은 충남 천안시 서북구 쌍용2동의 충무병원 앞에 위치해 있다. 여담으로, 동상이 있는 인도에서 횡단보도 2개를 건너면 [[2019년]] 초에 있었던 [[천안 라마다호텔 화재사고]]가 일어났던 그 호텔이 위치하고 있다. 아울러 천안시의 상징인 구 마스코트 횃불낭자, 신 마스코트 나랑이 역시 누구를 묘사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천안시를 연고로하는 [[천안 시티 FC]]의 마스코트인 나랑이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 [[202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판 EBSi [[수능특강]] 한국사 영역의 표지 모델로 사용되었다. *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로 유관순 열사를 떠올리지만, 더 많은 활동을 한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많은 여성들이 있다. 구한말의 의병장 [[윤희순]], 영화 [[밀정(영화)|밀정]]의 실제 모델인 [[남자현]], [[김마리아(1891)|김마리아]][* [[박마리아]]와 이름이 같아서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전혀 다른 사람이고 살아온 길도 전혀 다르다. 이름만 같을 뿐. 박마리아는 대표적인 친일파 중 한 명이고, 나중에 이승만 정권의 핵심인물이 되기도 한다([[이기붕]]의 아내). 그리고 이 친일파 박마리아도 이화학당 출신이다. 독립운동가 김마리아(1891-1944)는 연동여학교(現 [[정신여자중학교]], [[정신여자고등학교]]) 출신이다.][* [[김마리아(1903)|김마리아]](1903-1970) 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 또 있는데, 독립운동가 [[이범석]] 장군의 아내로, 이 분 역시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치신 훌륭한 분이다. 대한민국 설립 후, 이범석 장군이 초대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이 되면서, 이범석의 아내 김마리아와 이기붕의 아내 박마리아가 권력다툼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범석이 밀려나면서, 권력에서 멀어지게 되기는 했지만(이기붕과 박마리아의 최후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다.)] 박자혜, [[권기옥]], 차경신, [[박차정]], 등등. 좌파 계열로는 먼저 조선의용대에서는 대단한 활약을 해 백마 탄 여장군이라 불린 김명시 장군이 있었다. 경성 트로이카(=[[이재유]] 그룹)는 남녀 활동가 비율이 비슷한 독립운동조직으로 여성 최장기간 수감자(12년)인 박진홍, 이효정, 이병희, 이순금 등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가 활동했다. 그 외 수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있지만 알려지지 않았다. *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여성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꼽아 보면 [[김활란]], [[모윤숙]], [[노천명]] 등을 들 수 있는데 이 3명이 모두 이화학당 출신이다. 이들은 해방 이후에도 [[이승만]] 정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역시 이화학당 출신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였던 [[박인덕]]이 앞장서서 유관순 열사의 3.1 운동 업적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독립운동이 자신을 쉽게 드러낼 수 있는 활동이 아니기 때문에 숨겨진 인물들이 많이 있어서 이화학당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얼마나 많은 활약을 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다만 대표적인 여성 친일반민족행위자 3명이 모두 이화학당 출신이라는 것은 [[이화여자대학교]]의 영원한 [[흑역사]]로 남을 것이다. 심지어 이화여자대학교에는 아직도 김활란의 동상이 있다.[* 2017년 11월 13일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이 김활란 동상 앞에 ‘이화는 친일파 김활란의 동상이 부끄럽습니다’라는 제목의 현판을 세웠지만 11월 27일 학교 측에서 현판을 철거하였다.] * 그녀가 독립운동 활동을 했던 것을 기리기 위해 활동지였던 [[이화학당]] 인근의 버스정류소인 ‘서대문경찰서.농협은행’을 ‘서대문경찰서.농협은행.유관순 활동 터’로 병기한다.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5절에도 등장한다.[* [[3.1 운동|만세 만세]] 유관순] * 집안 전체가 [[개신교]] 집안이라 유관순도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부터 개신교 신앙을 접하고 믿게 되었다. [[천안시|천안]]에서 살 때는 온 가족이 매봉교회에 출석했고 [[이화학당]]에 입학한 이후에는 정동교회에 나갔다. 사실 [[정동교회]]가 이화학당에서 가장 가까운 교회라 이화학당의 학생들과 [[선교사]]들은 주일이 되면 이 교회를 나갔다. 당시 정동교회의 손정도 목사가 설교 중에 [[독립운동]]과 나라 사랑을 자주 이야기하고는 했는데 유관순은 손정도 목사의 설교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 자신이 어린 시절 살던 매봉산에 올라가 한 기도가 유명하며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도 자주 기도를 하고 다른 수감자들에게 개신교에 대해 이야기해 유관순에 감명을 받아 [[개종]]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1920년 순국한 뒤 당시 이화학당의 룰루 플라이 교장은 개신교식으로 유관순의 장례를 치러주었으며 당시 장례 [[예배]]는 손정도 목사가 집례했다. 현재도 개신교에서 개신교 독립운동가로 큰 비중과 명성을 차지하고 있으며 개신교계는 유관순에 대한 추모 예배를 자주 올리기도 한다. 2015년 유관순의 신앙적인 면을 다룬 영화 <소녀의 기도>가 개봉했고 2019년 3월 이화학당의 후신인 [[이화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 3.1 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유관순의 동상 앞에서 헌화 예배를 하기도 했다. 유관순 열사는 영국 선교사로 부터 daks 로퍼를 선물받아 독립운동 참여시 항상 착화를 했다고 전해진다. * 복역 기간 중 겪은 혹독한 고문과 구타로 인해 갈비뼈와 척추뼈, 골반뼈 등 몸을 지탱하는 모든 뼈가 박살났으며 그녀가 죽기 전 이뤄진 마지막 가족면회 당시 이미 걷거나 일어서는게 힘들 정도로 단 1년 만에 몸이 처참하게 망가졌다. 또한 폐와 간,신장,방광 등의 주요 장기도 파열되거나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1920년 9월 30일 예정대로 출소가 이뤄졌다고 해도 후유증으로 인해 오래 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훗날 독립 인도의 초대 [[총리]]를 지낸 [[자와할랄 네루]]는 영국에 의해 투옥되었을 당시 자신처럼 인도의 총리를 지내는 자신의 딸 [[인디라 간디]]에게 보내는 옥중 편지에서 당시 식민지 조선의 [[3.1 운동]]과 유관순 열사의 의거를 극찬하며 [[일본 제국]] 역시 영국과 다를 바 없는 제국주의 침략자라고 비판하는 동시에 식민지 조선인들과 유관순 열사의 행동을 본받을 것을 딸에게 주문했는데, 이 편지는 [[세계사 편력]]이라는 이름으로 책으로 출간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긴 편지라는 타이틀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되었다. * 2022년 8월, 30대 남성이 인천의 한 중학교 운동장 국기 게양대에 걸린 [[태극기]]에 유관순 열사에 대한 욕설을 써 국기를 모독하고, [[일장기]]를 대신 건 혐의로 검거되었다. [[https://www.news1.kr/articles/?4791413|'유관순 XXX' 태극기에 욕설, 중학교 국기게양대에 일장기 건 30대 영장 기각]]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