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교 (문단 편집) == 일본에서 == 일본에서 유교는 6세기에 들어왔다. [[백제]]의 오경박사(五経博士)가 513년에 전파했다. [[왕인]]이 [[논어]]를 들고 왔다는 얘기도 있어 5세기에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일본에선 종교적 색채가 엷었고 지배층을 위한 제왕학에 가까웠다. [[나라 시대]]와 [[헤이안 시대]]에 [[율령제]]가 쓰이자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유교 교육이 도입되었으나 일단 일본에는 [[과거 제도|과거 시험]]이 없었고 [[불교]]와 [[신토]]가 융성하면서 존재감을 상실했다. [[가마쿠라 막부]]에는 [[주자학]]이 전파되었다. 15세기에 이르면 [[오닌의 난]]이 일어나고 수도인 [[교토]]가 황폐화되면서 유학자들은 각 지방으로 들어갔으며 [[승려]]가 유교를 연구하는 일도 빈번하였다. [[에도 막부]]가 들어서자 불교와 유교를 분리하여 유교를 [[제왕학]]으로 사용하였다. 특히 에도 막부의 [[쇼군]]들 중엔 [[도쿠가와 츠나요시]] 같이 유교를 장려한 인물들이 있었다. 이는 통일 이후 전쟁이 사라지자 칼을 들 일이 없어진 [[무사(역사)|무사]]층을 관료로 만들기 위해서, 무사의 관심을 무에서 문으로 돌리고 [[다이묘]]가 무력을 길러 막부를 향한 반란을 막기 위해서, 이를 바탕으로 에도 막부를 조금 더 중앙집권적인 국가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다. [[양명학]]이나 [[성리학]]이 기본이 되었으나 자기들 자체적으로 고전을 해석하는 식으로 일본 유학은 독자발전하였고 무사 계층에서 발전하였다. 에도시대에 유교가 발전하고 막부 차원에서도 유교를 나라를 통치하는 중심 사상이자 학문으로 장려하여 다이묘들이나 사무라이들이 유교를 공부하였고 일본의 많은 관학에서는 다이묘와 사무라이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유교를 가르쳤다. 이런 분위기 속에 유교의 [[사농공상]]의 마인드는 일본에서도 나타났고 유교의 [[존왕양이]] 사상 같은 경우 [[메이지 유신]]의 밑거름이 되었다. [[메이지]] 같은 경우엔 상당히 유교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인물이었다. [[교육칙어]] 등에서 유교적인 배경이 잘 나타난다. 다만 무사층을 제외한 일반 상민이나 평민들 사이에서 유교는 [[듣보잡]]이었다. 그 때문에 현대 일본에서도 연구자를 빼면 유교를 아는 사람은 잘 없다. 다만 유교라고 직접적으로 강조하지 않았을 뿐이지, 에도 시대부터 [[장유유서]] 등의 종법질서 법칙을 무가제법도 등에 적용하면서 실제 일본 문화에서 유교의 영향은 매우 크게 나타났다. 유교는 종교로서가 아니라 사상으로서 사회, 문화, 제도, 양식 전반에 뿌리를 내려 현대 일본인들에게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로는 유교 도덕을 '수신' 등의 교과서 과목에 집어넣어 교육하면서 극단적인 충(忠)을 강조하는 등의 영향이 생겨나게 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Confucious_temple_Nagasaki.jpg]] [[나가사키]]의 공자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