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선(삼국지) (문단 편집) === 친정 실시와 황호의 대두 === 246년 가을에 대사령을 내렸고 겨울 11월에 장완이 죽었고 위략에 따르면 장완이 죽자 유선이 스스로 국사(國事)를 관장했으며, 252년에 아들 유종(劉琮)을 세워 서하왕(西河王)으로 삼았다. 253년 봄 정월, 대장군 [[비의]]가 위나라에서 항복한 [[곽순]](郭循)에 의해 한수(漢壽)에서 살해되고 성품은 바르지 못했지만 능력은 있었던 [[진지]]마저 258년에 사망하자 유선은 친정할 수밖에 없었다. 유선은 [[사면|대사령]]을 남발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며 또한 [[환관]] [[황호]]를 총애하여 국가의 기강을 문란케하였다. 친동생인 [[유영(촉한)|유영]]이 황호를 비판하자, 유선은 유영을 멀리하였다.[* 사실 유선이 멍청해서 무작정 황호를 총애하고 유영을 쳐낸 것이 아니고, 이 당시 황권을 강화시키려면 [[외척]]을 등용하거나 [[환관]]을 밀어주는 것 두 가지 밖에 없었다. 일반 관료들은 사대부 출신이고 집안의 후광을 업고 있으니 밀어줬다간 황제는 뒷방으로 밀려나는 결말이 기다릴 뿐이지만, 외척이나 환관은 황제가 권력투쟁에서 패배하면 함께 목이 날아가는 운명 공동체다. 게다가 황족은 잘못 키웠다간 뒷방으로 밀려나는 수준도 아니고 찬탈당한 뒤 소리소문 없이 [[공구리(도시전설)|처리]]당할 수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 제갈량이 집권하던 시기 유선은 바지사장이었고, 제갈량 사후에 권력을 되찾을 의도로 황호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던 것 뿐이다. 또 다른 예는 [[당고의 금]]이 있다.] 249년에 [[하후패]]가 촉한에 망명해오자, 유선은 하후패와 회견하여 그를 칭송하였고 전한 [[고제(전한)|고제]]의 건국 공신이었던 [[하후영]]을 들어 유씨와 하후씨의 인연을 강조하였다. 유선은 하후패를 극진하게 대해 작위를 높히고 높은 벼슬과 은상을 하사하였다. 254년에 대사령을 내렸고 256년에는 아들 유찬(劉瓚)을 세워 신평왕(新平王)으로 삼으면서 대사령을 내렸으며, 257년에도 대사령을 내렸다. 258년에 사관(史官)이 경성(景星, 도가 있는 나라에서 보인다고 하는 상서로운 별)이 보였다고 말하자 이에 대사령을 내리고 연호를 고쳤다. (연희 → 경요) 환관 황호(黃皓)가 처음으로 정사를 오로지했다. 250년부터 꾸준히 북벌을 도모하던 [[강유]]는 이 무렵에는 대규모 북벌을 도모하여 적도에서 큰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단곡에서의 패배가 단초가 되어 북벌을 반대하는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샀다. 이에 258년에 [[염우]]가 황호와 결탁하였으며, 황호는 강유와 염우를 교체하려고 획책하였다고 한다. 이를 황호 단독 행동으로 보기 어려운 것이, 조정에선 황호와 대립하던 [[제갈첨]], [[동궐]]마저 강유가 공적이 없고 국내가 북벌로 인하여 소진되었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소환하여 군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군부에선 [[요화]]가 '지모가 적보다 뛰어나지 않고 역량도 적으면서 용병이 끊이질 않는다'며 비난했고 [[장익(삼국지)|장익]]은 아예 면전에서 출병을 반대할 지경이었다. 이렇게 여야 할 것 없이 강유의 군권을 박탈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한 가운데, [[번건]](樊建)과 더불어 염우(閻宇)로써 강유를 대체할 것을 모의하였으나(학경 속후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선은 끝내 강유의 직책을 유지토록 지시하였는다. 이는 당시에 강유를 대체할 만한 경험과 재능을 가진 사령관급 무장이 없어서이기도 했고, 더불어 유선이 관료들 사이의 세력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강유는 촉한 조정이 자신을 해임시킬 것이라는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고, 262년에 다시 한 번 원정을 실패하게 되자 경질될 것을 두려워해 답중에서 할거하게 된다. 259년 여름 6월에는 아들 [[유심]]을 북지왕(北地王), 유순(劉恂)을 신흥왕(新興王), 유건(劉虔)을 상당왕(上黨王)으로 삼았으며, 260년 가을 9월에는 공신인 장군 [[관우]], [[장비]], [[마초]], [[방통]], [[황충]]의 시호를 추증했다. 261년 봄 3월, 공신인 장군 [[조운]]의 시호를 추증했고, 겨울 10월에 대사령을 내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