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수호(정치인) (문단 편집) === 판사 및 법조인 시절 === [[파일:유수호 1.jpg|width=400]] 부산지법 부장판사 시절 용두산 공원에서 수학여행을 온 차남 유승민과 찍은 기념사진. 1960년 [[대구지방법원]] 판사, 1966년 [[대구고등법원]] 판사, 1968년 [[대법원]] [[재판연구관]], 1970년 [[부산지방법원]] 부장판사를 역임하였다. 당시 형사배석판사였던 이선우 변호사에 따르면, 재기발랄하고, 촌철살인의 언변을 구사하셨던 분이었다고 한다. 그 입담은 아들에게 잘 이어진 모양. 부산지법 부장판사 시절인 1971년 [[부산진구 을]] 지역구의 [[민주공화당]]원 [[강성태]], [[최영해]]가 당시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최두고]] 후보의 패색이 짙어지자 당원 천여명을 몰고 가 위협하며 개표소에 유리병을 던지는 등 난동을 부린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에 유수호 재판장은 주범인 공화당원 두 명에게 징역형이라는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이는 한창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적 지지를 얻고 있던 시기였고, 아무도 건들지 못할 정도의 세력을 가진 공화당원에게 드물게 실형이 내려진 것이다.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4.27 개표조작 사건'[* 윤동수 울산시장과 울산시 공무원들이 개표를 조작하는 등 선거부정을 저질러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의 울산시 득표율이 76%에서 81.2%로 상승하게 만들었던 사건.]의 주범인 윤동수 울산시장에게 징역 3년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이는 [[박정희]]가 부정선거로 당선되었음을 법적으로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박정희의 대통령 당선 이후 어수선하던 당시 정국을 완전히 뒤흔드는 빌미가 되었다. 두 달 뒤에는 [[박정희]] 정권 퇴진을 부르짖으며 반정부 시위를 주동한 당시 [[부산대학교]] 총학생회장 [[김정길(1945)|김정길]]에 대한 구속적부심에서 "증거인멸 및 도주의 우려가 없다"며 김정길을 석방하였다. 결국 이러한 행동으로 박정희 정권에게 단단히 찍혔으며, [[10월 유신]] 이후 1973년 판사 재임용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참여정부]]에서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최영도]] 변호사도 당시 해직판사중 1인이었는데, 그는 유수호 전 판사에 대해 '''올곧은 판사며 소신있는 재판을 했던 사람이다. 또한 사법파동 당시 박정희 정권의 판사 재임용 탈락방침에 부산에 있는 판사들을 소집해 회의하고 미리 사표를 제출하자고 한 사람이 유수호 판사였다''' 고 증언하였다. 또한 [[국민의 정부]] 초기 행정자치부 장관이자,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동반자로 알려진 김정길 전 장관은, '''당시 유신 직전이라 학생운동에 박정희 정권은 상당히 민감했는데, 유수호 부장판사님이 쉽지 않은 판결을 해주셨고 저는 큰 신세를 졌다'''라고 증언하였다. 그 후 대구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였고, 대구고려합동법률사무소에서 일하였다. 이후 46세라는 꽤 이른 나이에 제30대 대구지방변호사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후에 대한변호사협회 부회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법조인 시절부터 남모르게 장학사업이나 불우이웃을 많이 도왔다고 한다. '유수호 장학회'를 설립하고 회장을 역임하면서 약 120명의 [[법과대학]] 재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했다고 한다. 훗날 고 유수호 전 의원의 장례식에서 [[경북대학교]] [[사회학과]] 동창회장이 편지를 통해 부의금을 전달하며, 학창시절 사회학과 학생 하나가 [[백혈병]]을 앓을 때 치료비를 흔쾌히 보태주었던 것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전하였다. 훗날 정계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각종 무료 법률상담 및 무료변론 그리고 국선변호를 이어나갔고, 그 결과 2002년 법의 날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