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일한 (문단 편집) === 형제 관계 === 본인이 은퇴하기 전 '''자신의 혈연, 친척들을 전원 회사에서 해고했다.''' 가족들 때문에 회사에 파벌이나 알력 다툼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이유였으며, 본인 선에서 정리해야 유한양행을 전문경영인이 이끌어 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이는 훗날 [[대한항공]]에서 일어난 [[대한항공 086편 이륙지연 사건|사태]]를 볼 때 참으로 빛나는 [[선견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대신 내보내면서 퇴직금을 매우 후하게 주었는데, 이 때문에 아들 유일선과 동생 [[유특한]]이 유일한을 상대로 '퇴직금 반환 소송'을 걸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본인들이 받은 퇴직금이 너무 많다고 회사에 전액을 반환하고자''' 소송을 건 것이다.[* 물론 그냥 회사에 반납했다면 간단했겠지만 당연히 유일한이 이걸 눈치채고 막았을 것이다. 그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소송까지 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이 소송을 맡은 판사가 "세상에 이런 집안이 있나?"라고 경악했다고 한다. [[왕자의 난 #s-3|이후에 타 재벌들이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보면]] 판사가 신기해할 만도 하다. 다만 이 내용은 사실이 아닌 후대에 창작되었거나 과장된 일화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https://www.fmkorea.com/best/2848289067|#]] 실제로 유유그룹의 공동 창업주이자 남동생인 유특한에게 "너도 나처럼 전문 경영인을 들이는게 어떻겠느냐?"고 권유하자 꽤나 망설인 유특한이 "형님, 죄송합니다. 저는 그릇이 작아서...''라고 했다. 유일한은 "하긴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지. 적어도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파]]만 안 된다면 말이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여기서 뜬금없이 친일 얘기가 왜 나오냐면, 후술하겠지만 동생 중 한 명인 [[유명한(기업인)|유명한]]이 [[일제강점기]] 때 유한양행 2대 사장을 맡아 운영하던 시절, 당시 최대 민족자본 기업이었던 유한양행은 일본총독부의 강요에 의해 전쟁 지원금을 기부해야만 했던, 소위 친일 행위를 했던 것 때문이다. 저런 말을 꺼낸 것으로 보아 유일한에게 평생 한이 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계몽사]]에서 발행한 위인전에는 [[1954년]]에 유특한이 "유한양행을 아예 '유한그룹'으로 기업 집단화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유일한은 "쓸데없이 확장하는 것도 좋은 게 아니다"며 유특한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다만 유한양행에서 분리된 후에도 유일한과 유특한은 가까운 사이를 유지했다. 유유그룹이 만든 비타엠과 비나폴로도 유일한의 조언을 듣고 지은 약품명이다. 형이 너무 뛰어나서 그렇지, 동생인 유특한도 성공했고 존경받을 만한 기업가다. 유특한은 독립운동이나 미국 유학 등등 여러 가지 사정들로 형이 잠시 기업을 떠나 있을 때 그 자리를 대신해서 유한양행을 맡아 경영했으며, 본래는 [[1941년]]에 3형제ㅡ 유명한,동한, 특한 삼형제가 설립한 유한무역의 대표였다. 유일한이 친족, 혈연을 전부 퇴사시킬 때 유한양행에서 유한무역의 분리를 선언하고, [[1957년]]에 유한무역을 제약 업체인 유한산업으로 변경하고 최근에 유유제약으로 사명을 변경,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한양행과 달리 유특한의 후손들이 유유제약을 운영하고 있지만, 성실하게 기업을 꾸리고 있다. 기업이 안정화될 때 즈음인 [[1975년]]에 기업 공개를 하고 상장했으며, 유특한 본인도 역시 경영에서 은퇴하고 죽기 전에 유유문화재단을 설립해 형처럼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후 [[1999년]]에 세상을 떠났다. 형을 따라서 유한양행만큼은 아니지만 모범 경영을 원칙으로 유유그룹을 발전시켰으며 그 때문인지 유유제약은 창업 후 단 한 번도 노사분규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유일한에게도 가족사의 어두운 면이 하나 있는데 바로 위에 언급된 또 다른 동생 [[유명한(기업인)|유명한]]이 [[일제강점기]] 때, 형님인 유일한을 대신하여 당시 최대 민족자본 기업이었던 유한양행 2대 사장의 책임을 맡아 운영하며 기업활동과 기업 존속을 위해, 일본총독부의 강요로 전쟁 지원금을 기부해야만 했던, 소위 친일 행위를 했던 것 때문이다. 선친 유기연과 형님 유일한의 항일 운동 정신과 기업을 운영해야만 현실은 일제 강점기 시절 국민이 겪어야만 했던 이해 상충이며 비극이다. [* 참고로 유명한 외의 나머지 동생들은 일찍 죽거나 언론에 노출 된 것이 적다. 그래서인지 사실상 유명한이 유일한과 유순한, 유동한, 유특한의 중간형제에 해당.] 유일한이 미국 유학 중 독립운동에 참여할 당시 이 사람은 [[http://ko.wikipedia.org/wiki/%EC%9C%A0%EB%AA%85%ED%95%9C_%28%EA%B8%B0%EC%97%85%EC%9D%B8%29|친일파가 되어]] 애국심이 투철했던 자기 형제들과는 완전히 딴판인 행보를 보인다. 그래서 형인 유일한과 동생인 유특한이 유명한과 절연해 버렸는데, 이 때 한 말이 "나는 동생 유명한은 둔 적 있어도 일본 놈 야나기하라 히로시(柳原 博, 유명한의 [[창씨개명]])라는 놈은 모른다!"였다. 해방 뒤에도 유한산업과 고려문화사 등을 경영하면서 1951년 부산으로 피난갔다가 여객선 사고로 사망했다. 유특한도 창씨개명을 했지만 그는 일본 유학이라는 특수한 경우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