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일한 (문단 편집) === 청년 사업가 === 대학교를 졸업한 유일한은 재미(在美) [[중국인]] 및 [[중국계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숙주나물]]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새내기 사업가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유일한은 시내 대로변의 유명한 가게의 '''쇼윈도에 트럭을 들이받아 일부러 교통사고를 냈다.''' 트럭에 실린 숙주나물이 담긴 병들이 도로변에 죄다 쏟아져 깨졌는데, 이 사건이 숙주나물을 기자들이 소개하도록 하여 [[미국인]], 특히 숙주나물을 조리하여 먹는 [[중국계 미국인]]들의 관심을 모아 사업이 번창하게 된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요즈음은 이러한 류의 마케팅 전략이 꽤 흔해졌고, [[노이즈 마케팅]]이라고 이름까지 붙었다. 다만 이 사건의 원인에 대한 묘사는 위인전마다 달라서, 1980년대 계몽사 위인전에서는 "유일한이 아이디어로써 사고를 냈다"고 명확히 서술하고 있지만, 일부 위인전은 "어쩌다 졸아서 사고를 냈다가 운이 좋았다"는 식으로 표현한 경우도 있다. 만약 이게 실제로 계획적인 사고였다면, 유일한 박사는 이러한 마케팅의 시초가 되는 셈.] 이후 그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았던 돈으로 숙주나물 병조림의 단점을 개선한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주)'''[*A]를 설립했다. 이후 [[1925년]]에 중국계 미국인 [[소아과]] [[전문의]] 호미리와 결혼해 1녀 1남을 얻었다. 미국 철도 회사 고위 임원으로서 중국인 사회에서도 이름 높았던 거부의 딸 호미리는 [[코넬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우수 재원이었다. 한편 독립운동을 하며 자산을 모두 쓴 [[서재필]]에게 유일한이 찾아와 함께 New Il-han & Co. 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조선에 있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장 애비슨의 귀국 권유로 [[연희전문학교]] 상과(현 [[연세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자리에 유일한을, 유일한의 처 호미리에게 [[세브란스병원]] 소아과 과장 자리를 제의해 귀국하기로 한다. 서재필은 유일한이 귀국할 때 [[유한양행]]의 버드나무 CI를 제작하여 선물할 정도로 유일한을 아꼈다. 이렇게 청년 사업가로서 바쁜 중에도 1922년에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남가주 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대학원에서 수학하였고, 1929년에 '''[[스탠퍼드 대학교|스탠포드 로스쿨]](Stanford Law School)'''에서 국제법을 공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