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정(원나라) (문단 편집) === 원에 투항하다 === 보우 2년(1254년) [[이증백]]을 따라 촉에 입성해 장수로 선발돼 전공을 쌓았다. 경정 원년(1261년) 4월, 노주지부 겸 동천로안무부사로 승진하였다. 본래 북방 사람인 유정은 무공으로 승진을 했는데, 남쪽의 여러 장수들이 모두 그 밑에서 나와 여문덕[* 남송의 명장이었으나 가사도에게 결탁했고 가사도는 변방의 장수들을 배척했다.]의 질시를 받았고, 유정이 계책을 내도 [[여문덕]]에게 이를 부정당하고, 공로가 있으면 여문덕이 숨기는 등 여문덕에게 무시당하였고, 여문덕은 유정과 갈등하던 유흥을 사천제치사에 앉혀 유정을 견제하게 했다. 여문덕은 유흥과 결탁하여 유정을 박해한다고 무고하려 했다. 소식을 접한 그는 놀란 가슴을 졸이며 임안에 사람을 보내 조정에 상고했으나, 듣지 않았다. 그는 상사벽과 조세웅[* 조세웅은 부릉에서 다리를 끊고 후퇴하는 몽골군을 추격해 많은 전과를 올렸다.]이 [[가사도]]에 의해 죽는 것을 보고는[* 가사도가 실행한 타산법으로 인해 많은 장수들이 처벌을 받았다.] 부득이하게 노주를 바치고 몽골에 투항하게 된다. 원 중통 2년(1261년) 6월, 유정은 몽골에 의해 기로행성(氣路行省) 겸 선무사(善務使)로 임명되었다. 이를 들은 송이종은 발끈하여 유흥에게 유정을 토벌하도록 명했고, 유정은 자신의 재산을 병졸들에게 나누어줘 10여 회 격전 끝에 유흥을 물리쳤다. 또한 그는 병사를 주둔시키고 후하게 축적하는 투송대계를 제시했다.[* 유정의 투항은 몽골 제국이 수군을 육성하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수군 전력이 달리는 몽골 제국이었는데, 유정이 그가 이끌던 수군과 노주를 바치니, 몽골 제국은 수군 육성에 엄청난 효과를 보게 되었다. 비록 노주는 여문덕이 이듬해 탈환했지만 여문덕이 유정을 무시한 것은 남송에 있어 치명적이었다.] 중통 3년(1262년)에 순례에 들어가 쿠빌라이를 만나 성도로·동천로에 머물렀으나 여전히 도원수를 겸하고 있던 중서성(中書省)의 동료가 유정의 공로를 질투하여 모함하려 하자 두려운 나머지 동천 분수를 청하였다. 7월에는 동천도원수로 자리를 옮겼다. 중통 4년(1263년) 5월 송의 [[고달(남송)|고달]][* 송의 명장 중 하나이나 나중에 원에 투항한다.]이 온건(溫溫)으로 성도에 접근하자 유정이 명을 받고 달려들었고, 송군은 효지(孝至)가 있다는 말을 듣고 둔해 동천을 공격하려다 패했다. 지원(至元) 3년(1266년) 6월, 소무대장군(昭武大將軍), 남경로(南京路) 선무사(宣務使)로 옮긴다. 지원(至元) 4년(1267년) 11월, 입조하여 남송(南宋)을 멸망시키려면 반드시 양양을 점령해야 한다고 진언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