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윤봉길 (문단 편집) === 출생과 독립운동 투신 ===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덕산군]] 현내면 조량리(現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예산)|덕산면]] 시량리 목바리마을)에서 아버지 윤황(尹璜)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원상(金元祥)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윤우의(尹禹儀)이다. 11살 때이던 1918년에 덕산공립보통학교(現 예산덕산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조선인으로써 우리말도 맘대로 못 쓰고 외국말인 [[일본어]]를 쓰고 배워야 한다는 것과 꼴도 보기 싫은 [[일본인]] 교사 휘하에서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에 불만이 상당히 많았고[* 게다가 교장도 일본인이었다.], 결정적으로 이듬해 3월 초 [[3.1운동]]을 보고 더 일본인을 [[증오]]하게 되었으며, 그 길로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부모님에게 폭탄선언을 하고[* 물론 부모님은 말렸지만, 윤봉길은 기어이 본인의 뜻을 밀어붙였다.] 자퇴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히 학업을 멈춘 것은 절대로 아니었고, 그 대신 [[한학]]을 배우러 [[서당]]을 다녔다. 학교를 다니던 도중에는 한 번은 일본인 교사 아래에서 일본어 기초를 배우던 도중에 동급생에게 [[학폭]]을 한 전력이 있다. 일본인 교사가 「[ruby(私, ruby=わたし)]は[ruby(日本人, ruby=にほんじん)]です。」(나는 일본인입니다.)라는 문장을 따라해 보라고 하였으나 아무도 하지 않자 윤봉길의 짝꿍이 따라하여 보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윤봉길은 방과 후 짝꿍을 뒤뜰로 끌고 나가 [[떡실신]]시켰고, 그와 함께 "왜놈된 기분이 어떠냐? 조선 사람이 왜놈 될려면 얼굴 생긴 것부터 뜯어고쳐야 돼!"라는 명언을 남겼다. 대표적인 일화로 동네에서 글자를 몰라 아버지의 묘소를 찾지 못하는 농부[* 농부가 문맹인지라 글을 읽지 못하니 근처 묘소들에 꽂힌 묘비(무거운 돌로 된 비석이 아니라 껍질을 깎은 굵직한 나무막대 묘비다.)들을 모조리 뽑아와 윤봉길 앞에 내려놓고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농부로부터 아버지 이름을 들은 윤봉길은 금방 그것이 적힌 묘비를 찾아 주었지만 "여기 있기는 한데, 이 묘비를 '''어느 무덤에서 가져왔는지 위치를 기억하거나 표시라도 해 두었습니까?'''"라고 물었고 농부는 그제서야 아버지의 묘를 영영 잃어버렸다며 통곡했다고 한다. 아버지 묘를 찾자고 다른 무덤에 있는 묘비까지 몽땅 뽑았고 설상가상 위치 표시도 하지 않았으니 다른 묘소들의 묘비 마저 영영 못찾게 된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 것이다.][*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일화 중에는 길을 가다가 얼굴 한쪽이 흉하게 짓무른 여자아이를 보고 놀라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니 어릴 때 눈에 [[다래끼]]가 난 것을 아이의 어머니가 어디서 [[민간요법|선인장을 구해다 짓이겨서 눈에 바르면 다래끼가 낫는다]]는 말을 듣고 와서 그대로 했다가 그만 부작용만 나서 얼굴 한쪽이 완전히 짓무르고 말았다는 것이었고 이에 충격을 받아 교육에 투신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도 있다.]를 보고 교육에 뜻을 가져 [[http://www.woljin0429.com/|월진회]]를 조직해 야학과 강습회를 열어 [[문맹]] 퇴치 및 [[계몽]] 운동에 힘썼다. '월진회'는 설립 초기에는 계몽 운동 조합으로 운영되었지만 현재는 농촌 체험 마을 사업, 마을 도서관 건립 운동, 윤봉길 문화 축제 등을 추진하며 여전히 활동 중이다. 1944년~1946년까지 '우진회'라는 이름으로 존속했지만 1946년 다시 월진회로 환원했다. 현재 공식 명칭은 초대 회장이던 윤봉길을 기리는 의미에서 '매헌윤봉길월진회'로 쓰고 있다. 윤봉길은 이후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만주]] 등의 지역에서 갖가지 사회 활동을 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 [[불교]]계에서는 이때 윤봉길을 김구에게 보낸 인물이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한용운]]과 함께 불교계 대표로 나섰던 [[백용성]]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점은 백용성의 제자였던 도문이라는 승려의 구술 말고는 입증할 만한 명확한 증거가 없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883752.html|#]]] [[한인 애국단]]에 소속되었다. [[칭다오]]에서 일본인 부부가 운영하는 세탁소에서 일하며 때를 기다렸으나 [[만주사변]] 이후 윤봉길은 "죽을 자리가 없어졌다."라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서 김구와 만났다. 이때 "[[이봉창]] 의사와 같은 일로 써 달라"라고 부탁했다.[* 배경식 교수는 《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와 개정판인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을 통해 윤봉길 의사가 김구를 찾아간 것을 최대의 수확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윤봉길은 조국을 떠나며 '[[형가|장부출가생불환]]'[* '丈夫出家生不還'. '사나이 대장부가 집을 떠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뜻을 가졌다.]이라고 말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