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윤정희(1944) (문단 편집) === 영화배우 활동 === 대학 졸업 이후, 1967년 영화 [[청춘극장(1967)|청춘극장]]의 오유경 역할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지금 이 영화는 원본이 소실되었으나 [[중국어]] 더빙이 남아 있다.] 이후 [[남정임]]·[[문희]]와 함께 [[1960년대]]와 [[1970년대]] 대한민국 여자 영화배우 [[트로이카]]로 큰 인기를 얻었다. [[청춘극장(1967)|청춘극장]]은 1967년 [[팔도강산]] 다음의 관객을 동원했다. [[1968년]]에는 [[내시]], 천하장사 임꺽정, [[일본인]] 등으로, 1969년에는 [[독 짓는 늙은이(영화)|독 짓는 늙은이]], [[팔도 사나이 시리즈#팔도 사나이|팔도 사나이]]로 큰 인기를 끌었다. 물론 이는 일부분일 뿐 흥행한 영화는 이보다 많다. 사실 그녀는 단순하게 인기가 많은 데에 그치지 않고 폭 넓은 배역 폭을 보여줌으로써 영화사에 굵직한 기여를 했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cr333&logNo=120061757343&isFromSearchAddView=true|한 블로거의 말에 의하면]], 당시 젊은 여배우가 맡는 통상적인 역할은 '청순가련형'과 '요부형' 이 두 가지 역할이 대부분이었는데, 윤정희의 경우에는 이 두 역은 물론이고 [[백치미]]까지 능숙하게 연기했다고. 단순히 트로이카들과 비교해도 이 차이가 두드러지는데, 하이틴 스타와 같은 통통 튀는 발랄한 역을 연기한 [[남정임]], 우수에 빠진 눈매로 비련의 여인을 연기했던 [[문희]]에 비해 폭 넓은 역을 맡았다. 또 그녀의 이미지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지적인 세련미이다. 그러나 [[문희]]가 [[미워도 다시 한번]]의 흥행 이후, 1969년 [[벽속의 여자]], [[꼬마신랑]] 등을 대거 흥행시키며 1970년대부터 윤정희를 능가하여 조금 위축된 감을 보여줬다. 하지만 1971년 문희와 남정임이 은퇴한 반면 윤정희는 결혼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활동했다. [[1976년]]에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결혼했고, 이듬해 딸 백진희를 낳았다. 부부 금슬은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1977년에는 야행이 그 해 흥행 영화 5위권 안에 들어가며 저력을 보여줬다. 당시에는 영화 말고 드라마가 크게 성장했는데, 윤정희는 드라마에서도 활약을 한 적이 있다. 그러다가 [[1981년]], [[자유부인 '81]]이 그해 흥행 1위 영화가 되면서 [[남정임]], [[문희]]가 이미 이룬 영화 1위 흥행 여배우 자리에 뒤늦게나마 올랐다. [[1987년]]에는 위기의 여자로 흥행을 했으며, 1994년에는 만무방으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후 잠시 활동을 중단했다가 만 66세였던 2010년에는 영화 "[[시(영화)|시]]"로 청룡영화상과 대종상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본인의 진가를 다시 한 번 입증했다. 후술하겠지만 이후로는 [[알츠하이머]] 투병 때문에 이 영화 이후 사실상 은퇴했으며, 심지어 해당 영화를 촬영하던 당시에도 알츠하이머 초기 증상으로 인해 대사를 적어놓고 촬영에 임했다고 한다. 1967년부터 2010년까지 43년 동안 [[대종상]] 여우주연상 3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3회, [[백상예술대상]]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3회 수상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