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을사사화 (문단 편집) == 진짜는 지금부터 - [[정미사화]](양재동 벽서 사건) == 4대 사화라고 하지만, 다른 사화들에 비해서는 을사사화의 규모는 매우 작다. 도리어 피바람은 명종 2년(1547) 1월 이임, [[나식]], 나숙 형제, 권벌 등 윤원로를 탄핵했던 사람들을 사사하거나 유배를 보내고 2월 이중열, 성자택, 김저 등이 윤임과 한패라는 이유로 처형되는 데서 시작했다. 같은해 9월 [[양재역 벽서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이홍윤 옥사 사건이 터졌는데, 그 유명한 '''[[충청도]]가 청홍도가 된 사유이다.''' 이홍윤 옥사는 죽은 사람만 30명이 넘었고 양재역 벽서 사건도 조정의 거물들이 대거 유배되는 등 규모 자체는 엄청났다. [[이언적]] 계통도 을사사화 때는 사실 윤임을 몰아내는 데 울며 겨자먹기로 수행했다가 양재역 사건에서 삭직되었다. 그렇기에 을사사화 자체도 그 후 6년간 '소윤의 잔혹시대'를 상징하는 의미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사건의 여파가 매우 큰 데다, 이를 옥사로 연결할 때 [[윤원형]] 일파의 억지가 심하여서 벽서 자체가 조작 아니냐는 의심도 있다. 벽서를 썼다고 의심되는 자를 처벌하려 든 것도 아니고 '이전의 옥사 때 제대로 처벌이 되지 않아서 이런 여론이 나오는 것이니 이 참에 제대로 해야 한다'는 논리 아래 윤임의 잔여 세력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실록의 사관조차 처음 벽서를 발견하고 사건을 확대한 [[정언각]] 본인을 조작범으로 의심하기도 한다. 정언각은 이후의 옥사에도 적극 참여하면서 악명을 쌓았는데, 어찌나 평가가 나빴는지 정언각이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사망할 당시 사람들은 그 말을 '의로운 말'이라고 칭찬했다고. 심지어는 '이 말은 옥사 때 죽은 임형수의 말이었기 때문에 주인의 복수를 한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떠돌았다.[* 이 사람의 차남 정신의 아들, 즉 손자가 바로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유명한 [[정문부]]이다.] 을사사화의 피해자 중에는 퇴계 [[이황]] 일가도 있었다. 이황의 형 이해는 윤임 일파로 몰려서 갑산으로 귀양을 가다가 병사했고, 이황도 홍문관 전한(典翰)에서 파직당했다가 곧 복직했으나 병을 핑계로 낙향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