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응오딘지엠 (문단 편집) === 낡은 전통주의자 === 응오딘지엠이 가톨릭과 유교에 집착하여 자본가와 지주의 이익만 옹호하다가 결국 현대성에 휩쓸려간 것이라는 해석이다. 여기서는 응오딘지엠이 미국의 꼭두각시는 아니라고 보지만 케케묵은 낡은 인물이라고 비판한다. 응오딘지엠은 아버지 응오딘카로부터 고전 한문과 유학을 배우는 한편 라틴어와 프랑스어도 배웠다. 자본주의의 끝을 달리던 미국의 [[경제 대공황]]을 지켜보면서, 응오딘지엠은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를 맹목적으로 따르기보다는, 유교를 현대에 맞게 재해석하여 향촌 사회에서부터 교화를 이뤄내고 국민의 이타심과 공동체주의를 함양하기를 꿈꿨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남베트남에 현대판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이루려 한 것이다. 그는 또한 프랑스에서 사서 교육을 받았던 동생 응오딘뉴로부터, 에마뉘엘 무니에(Emmanuel Mounier)[* 이 사람은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비시 프랑스]]에 부역했다.]의 가톨릭 인격주의(personism)[* 사람은 서로를 수단이 아닌, 존귀한 인격체로 대해야 한다는 공동체주의적 사상.]를 접한 후 유교와의 유사성이 있다고 느꼈고, 이를 베트남이 따라야 할 제3의 길이라고 믿었다. [[https://rootasia.co.kr/jemogeobseum-15/|#]] 그러나 다원적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이 보기에는 응오딘지엠의 이러한 행보가 구태의연한 권위주의로 보일 뿐이었고, 응오딘지엠 본인의 내향적인 성격과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버릇으로 인해 주변 관료들과는 물론 미국인 인사들과의 오해는 갈수록 커졌다. 이는 미국과 응오딘지엠이 계속해서 노선 충돌을 일으키는 주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응오딘지엠은 불교와 [[까오다이교]] 등을, 자신이 추구하는 유교와 가톨릭 인격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구습'으로 인식하고서 마구 탄압했다. 결국 1963년 응오딘지엠은 틱광득 소신공양 후 퍼스트레이디를 방치해 놓고 '[[소련]]이 [[유고슬라비아]]에 하듯이 [[미국]]도 베트남을 그렇게 대해달라'며 독자 노선을 추구할 것임을 대놓고 선언하고 북베트남과도 물밑에서 화해 및 상호지원의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자력으로 나치 독일을 몰아낸 티토와 달리 응오딘지엠은 미국에 빌붙고 이용해 먹은 탓에 외줄타기가 될 리가 없었다. 티토는 자기들만의 공산주의를 시행하고 외세 의존받지않고 잘 이어나갔는데 응오딘지엠은 밀집촌 프로젝트를 실패하였고 이러한 응오딘지엠의 움직임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경계하던 미국의 심기를 제대로 거슬렀고, 얼마 안 가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방조를 등에 업은 쿠데타로 축출되어 죽었다.[* 티토가 소련의 왕노릇에 대한 반발로 코민포름에 탈퇴한 이유다.] 하지만 전통주의자 해석에 있어서도 응오딘지엠의 정권이 미국의 배신으로 붕괴되지 않고 존속되었으면 응오딘지엠의 '자애로운 권위주의'가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란 긍정적인 견해도 있다. 만일 응오딘지엠이 제수가 인터뷰를 해서 사고 치는 것을 막았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고. 정권에 위협되는 반정부세력이라고 어쩔 수 없이 말했다면 미국의 심리가 달라졌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