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응오딘지엠 (문단 편집) ==== [[장제스]] ==== 1954년, 그가 수상으로서 집권했을 때의 베트남국의 상황은 일견 [[국민혁명]] 직후 일시적으로 통일된 중화민국의 상황과 비슷해보인다. 혼란기 동안 여기저기 난립한 군벌, 권위가 없던 전임자([[장쭤린]], 응우옌푹브우록)의 정권, 그리고 여전한 외적 등. 어쩌면 응오딘지엠이 철저하게 정치적 다원주의를 배제하고 정적 숙청으로 일관한 것은 통일 중화민국의 [[반장전쟁|개판인 상황]]을 보고 느낀 것이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응오딘지엠은 장제스와는 달랐다. 중국 군벌들은 부패한 똥별들이 많았고 이념적 기반도 부실했다. 남베트남의 군벌들은 빙쑤옌 같은 그런 조직도 있었지만, 독립전쟁 기간 동안 강력한 외적인 프랑스를 상대로 맞서 싸워 능력을 증명한 인물들도 많았고, 일단 북쪽의 공통된 적이었던 북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단결은 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진 인물들이 꽤 많아 응오딘지엠이 초기의 유화적인 태도를 유지했다면 제대로 포섭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응오딘지엠은 장제스와는 달리 군사적인 능력이 전무했다는 것이다. 장제스가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황포군관학교 교장을 맡으면서 군사적인 지식을 착실히 쌓은 뒤 거물이 된 것과 달리, 지엠은 관료 계통의 독립운동가였을 뿐이지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무력으로 저항운동을 한 적은 없었다. 이런 차이는 군사적인 성과 차이로 드러났는데, [[중일전쟁]] 시기에 군벌군이 연이은 추태를 보이는 와중에도 장제스의 직속군은 나름의 체면치레는 했다는 평가를 듣는 데 비해, 1955년 당시에 나름 싸울 줄은 아는 군대였던 남베트남 정규군은 지엠의 집권이 길어지면서 질적으로 심각하게 저하되어 [[압박 전투]] 같은 개망신을 당하는 등 공산군을 상대로 (1955년에 바로 그 정규군에게 숙청당했던) 1955년 이전의 까오다이교, 호아하오교 군벌들보다 훨씬 처참한 수준을 보였다. 사실 장제스도 군사적으로 고평가만 받을 인물은 아니긴 하다. 군부의 부정부패를 제대로 해결 못 해서 군 질적 저하를 불러왔고, 중일전쟁에서의 뛰어난 판단력은 어디로 갔는지 [[국공내전]]에서는 실책을 거듭하다 대만으로 쫓겨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응오딘지엠은 장제스보다도 실책이 심각했으며, 그나마 성과라고 불릴 만한 것도 "전술은 오십보백보인데 숫적으로 많은 쪽이 이겼다"라는 평가를 듣는 1955년의 사이공 전투 정도를 제외한다면 없었다. 그래도 1955년에 숫적으로 밀어붙이면 이길 줄은 알았던 남베트남군이 압박 전투에서는 비정규군 베트콩을 상대로 패배할 정도로 약해진 건 당연히 응오딘지엠의 책임이다. 장제스 중앙군은 적어도 이 정도로 중앙군의 질적 저하가 두드러지진 않았다. 스스로의 군사역량조차 함량미달인 주제에 정치동맹이었던 군벌 지도자들마저 토사구팽했던 실책은 베트콩의 대대적인 침투라는 결과로 되돌아왔다. 1960년에 이미 쿠데타가 한 차례 일어났고, 1963년에 성공한 쿠데타의 주역이 다름 아닌 그가 밀어준 즈엉반민이었다는 사실은 지엠이 장제스보다 군 내부를 통제하는 정치력조차 훨씬 떨어졌음을 보여준다. 차라리 국부천대 이후의 장제스처럼 군대를 철저히 휘어잡고 철권통치를 했다면 종교파 군벌이 사라진 남서부 지역의 군사적 공백으로 베트콩의 침투가 쉬워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스스로가 1963년에 쫓겨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