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응오딘지엠 (문단 편집) ==== [[이승만]] ==== '군사적 경험은 없지만 외국을 돌아다니며 외교적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이란 커리어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친미국가의 초대 대통령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점을 보자면 이승만과의 공통점이 많다. [[이승만]]은 지엠과 달리 자신 외의 반공 독립운동가를 모조리 숙청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대한민국 국군]]은 베트남 공화국군과는 달리 군사적 경험이 있던 독립운동가였던 [[이범석]], [[손원일]], [[김홍일(군인)|김홍일]], [[최용덕]] 같은 사람들이 초기에 군 수뇌부로 큰 무리 없이 편입되었고,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 장교들과의 갈등도 아예 없진 않았겠지만 문제가 있을 수준으로 두드러지는 일은 없었다. 이승만은 응오딘지엠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지엠의 정치적인 협소성 때문에 베트민 게릴라를 많이 상대했던 종교파 군벌 쪽 군인들이 정규군에서 배제되는 결과를 낳았고, 여기에 지엠이 군대를 지나치게 못 믿어서 능력보다는 충성심 위주로 장교들이 승진해서 결국 남베트남군 막장화의 초석이 마련되었다. 같은 군사경험 없는 독재자였어도 이승만은 적어도 전쟁이 터진 뒤에는 자신의 비전문가로써의 한계를 인정하고 [[아돌프 히틀러]]처럼 무리하게 자국군 장성이나 미군 장성들의 결정에 토를 달아 발목을 잡지는 않았고, 지엠은 그렇게 했기에 이승만과 달리 공산군과 싸울 수 있는 군대를 만드는 데 철저하게 실패했다.[* 그 히틀러조차도 [[제2차 세계 대전]]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자국군 장성들의 의견을 존중했고 그 결과 대전초 독일군은 승승장구했었다. 즉, 응오딘지엠은 군사적인 부분에선 그 히틀러보다도 못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응오딘지엠은 이승만과 차이를 보인다.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반공]]이라는 이념적 우산 속에 모여들어 철저한 이념적 통일성을 이루어낸 반면, 남베트남 응오딘지엠 정부는 스스로를 정당화할 기제를 갖지 못했다. 베트남에서의 반공이데올로기를 통한 결집은 그 집단의 반민족성을 자인하는 것밖에 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것이었거, 남베트남의 지배집단은 권력 안에서 보호받기를 원했지만, 그것이 곧 반공이데올로기를 철저히 신봉하는 것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었다.[*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533 참고.] 그리고 이승만은 지엠과 달리 달리 [[농지개혁]]에 성공했으며 여순사건을 통해 군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을 축출하는데도 성공했다. 이승만은 정권 초반 농지개혁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내어 미래 경제발전의 기틀의 닦았으며 [[6.25 전쟁]] 당시 북한이나 공산주의자들에게 민심이 흔들리지 않게 막아냈으나 지엠은 그러지 못했다. 또한 이승만이 정권 초반 군 내부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지 않았다면 [[6.25 전쟁]]이 터졌을 때 군내부에 수많은 간첩과 반란세력을 안은 채로 전쟁을 치뤄야 했을 것이며 [[여순반란사건]] 같은 군내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지엠은 이것에도 실패하여 이 후 [[베트남 전쟁]] 때 남베트남은 군내부에 수많은 간첩들을 안고 전쟁을 치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