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응오딘지엠 (문단 편집) == 여담 == [youtube(ydinsgfM8kw)] 영상 초반의 곡은 베트남 공화국의 국가인 [[공민에게 고함]]이다. * 1957년 9월에는 [[대한민국]]으로부터 [[대한민국 훈장|건국훈장 중장]](현재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 인식은 좋은 편이었고, 반공 정부 지도자로서 언론에서 높이 평가했지만 죽은 뒤에 응오딘지엠의 치세가 비난을 받고 국내 교과서에서도 그냥 이름만 언급되며 상세하게 거론되지 않았었다. * 전술되었듯이 1960년대 초반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의 영향력을 교두보 삼아 북베트남에 접촉해 협상과 자체적인 중립화 논의를 시도한 적 있다. 성공했다면 베트콩과의 내전을 마무리하고 불안하게나마 평화가 지속될 '''수도''' 있었겠지만, 쿠데타군에 의해 피살되면서 접촉은 중단되었다. [* 협상이 성공했어도 남베트남 공산화의 위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중공군과 소련 고문단, 미국 주도 연합군이 어지러이 참전한 초대형 분쟁인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고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났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 인도를 방문하는 등 제3세계와의 관계도 꽤 중시한 편이었고, 미국과의 관계 역시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자주적이어야지 장제스의 대만이나 이승만의 남한처럼 지나치게 의존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인식했다고 추정되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물론 제3세계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것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잇따라 독립하는 당대의 사정을 볼때는 괜찮은 길이었지만 본인이 알아서 말아먹는 바람에 그 노력이 쓸모없어졌다. [[분류:베트남 공화국 총통]][[분류:베트남의 독립운동가]][[분류:아시아의 독재자]][[분류:건국자]][[분류:1901년 출생]][[분류:1963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대한민국장]][[분류:암살된 인물]][[분류:총기에 죽은 인물]][[분류:꽝빈 성 출신 인물]][[분류:외국의 실향민]][[분류:사회운동가 출신 정치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