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응오딘지엠 (문단 편집) === 8월 혁명에서 집권까지 === 1945년 8월, 혁명으로 [[바오다이]]의 베트남 제국은 붕괴되었으나 1949년, 엘리제 협약을 통해 바오다이는 다시 베트남의 지도자로 복귀했다. 응오딘지엠은 이런 상황에 반발하여, 1949년 6월 16일 성명을 통해 베트민은 물론 바오다이와도 협력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친프랑스파는 물론 베트민 역시 응오딘지엠을 위협적인 라이벌로 여겨, 1950년 2월엔 응오딘지엠 암살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응오딘지엠은 가톨릭 주교인 둘째 형 응오딘툭과 함께 외유를 떠나기도 했다. 1945년 당시 호치민과 응오딘지엠은 만난 적이 있었는데, 당시 호치민 정부는 반공 민족주의자인 응오딘지엠을 베트민 정부와 협력하는 관계로 만들고자 했었다. 아래의 대화는 스텐리 카노우의 책에 나오는 대화다. > 응오딘지엠: 나에게 뭘 원하는 겁니까? > > > 호치민: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 것은 당신이 나에게 항상 원했던 것입니다.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당신의 협력이오. 우린 같은 대의를 추구합니다. 따라서 우린 함께 해야 합니다. > > > 응오딘지엠: 당신은 조국을 불태우고 파괴한 범죄자입니다. 또한 당신은 나를 포로로 붙잡았고요. > > > 호치민: 그런 불상사가 일어난 것에 대해 먼저 사과합니다. 억압받던 민중들이 봉기하면 그런 실수들은 불가피하고 비극이 나타나죠. 하지만 저는 인민들의 복리가 그런 오류보다도 더 중대하다고 봅니다. 불만의 여지가 있겠지만 이제는 잊어버리도록 합시다. > > > 응오딘지엠: 당신의 부하들이 내 형을 죽인 것을 잊어버리라는 얘기오? > > > 호치민: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 형제들의 죽음에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소. 나 또한 이 지나친 일에 대해 당신만큼이나 유감스럽게 생각하오.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이오! 당신을 이곳에 데려오기 위해 제가 명령이라도 > 한 줄 아십니까? 더군다나, 당신을 이곳에 부른 이유는 우리 정부의 중차대한 직책을 맡기게 하기 위함입니다. > > > 응오딘지엠: 친형제와 친형의 자식은 수백 명의 사망자 중 2명에 불과합니다. 이외에도 수백 명이 배신당했습니다. 나를 불러 함께하자고 초청할 자격이 있다고 자부할 수 있소? > > > 호치민: 과거 일에 지나치게 빠져 있군요. 미래세대에 대한 교육과 인민생활의 향상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 > > 응오딘지엠: 몰지각한 말만 하는구려. 협박을 받으면서까지 나는 조국을 위해 일할 이유가 없소. 나는 자유인이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고. 똑똑히 보세요. 내가 탄압과 죽음에 겁먹을 사람으로 보이는지. > > > 호치민: 당신은 자유인이오. >---- > Vietnam: A History, Viking, 1983, p.232~233 이때 응오딘지엠은 일본, 미국을 들러 정치학자 웨슬리 휘셸, 미국 국무부 관리 등을 만나며 정치적 입지 확보를 꾀했고 바티칸을 들러 교황 [[비오 12세]]를, 프랑스에서 바오다이와 만나 민족주의 세력의 결집을 꾀했으나 결과가 신통치 않아 정세가 자신에게 유리해질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이때 미국 방문 등이 성과를 거두었는데 [[존 F. 케네디]], 마이크 맨스필드, 윌리엄 더글라스를 비롯한 미국의 정치 거물들과 1953년에 접촉하여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어 미국이 자신을 지지하게 만든 것이었다. 같은 시기에 응오딘지엠의 동생인 응오딘뉴는 베트남에 남아 형을 위해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고 있었다. 결국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하자 궁지에 몰린 바오다이는 응오딘지엠을 수상으로 임명했다. 이에 대해 미국의 압력이라는 해석이 많았으나 결정적인 증거는 발굴되지 않고 있으며 바오다이는 이것이 베트남인들 스스로의 논리적 선택이었다고 회고했다. 1954년 6월 16일, 응오딘지엠은 전권을 약속받은 총리직을 수락했다. 그가 [[프랑스]]의 꼭두각시로서 세워졌다고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시기에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은 군사적인 패배로 일소되고 있었다. 이후 제네바에서 베트남 문제 해결을 위한 9개국 회담이 개최되면서 1956년, 전국선거 이전까지 베트남을 북위 17도선에서 분할한다는 것이 합의되었고 프랑스 군대는 총선거 실시 때까지 주둔하기로 하였다. 이 제네바 협정에서 [[미국]]은 협정 준수는 선언했지만, 북베트남의 공산화를 불만스럽게 여겨 서명은 하지 않았다. 바오다이 정부 역시 서명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