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응오딘지엠 (문단 편집) === 독재의 길과 미국에 대한 의존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go_Dinh_Diem_at_Washington_-_ARC_542189.gif]] || || [[1957년]] [[미합중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포스터 덜레스]]와 만나는 응오딘지엠 || [[1956년]], 응오딘지엠은 베트남 공화국 헌법을 발표했다. 헌법 자체는 구구절절 명문이었는데, 문제는 응오딘지엠 자신이 그다지 민주적 인물은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대중 앞에 서는 것을 불편해했고 정권 비판에 민감하여 반정부 세력에 대해 신속한 탄압으로 대응했고 북부 출신 반공주의자들만 가까이하며 편협해졌다. 특히, 혁명위는 종교주의자부터 민주사회주의당이라는 이름이 붙은 정당 소속 사람들까지 매우 다양한 성향을 가진 인사들이 오직 타도 베트남 공산당, 타도 호치민의 기치 아래에 모인 것이었기에 그 목소리가 매우 다원적이었고, 민주주의보다는 권력을 독점하고 싶던 응오딘지엠은 이 조직의 존재가 매우 불편했다. 때문에, 베트남 공화국이 정식 출범하자마자 즉시 까오다이교와 호아하오교, 그리고 기타 응오딘지엠의 세력을 제외한 정치권에 대한 격렬한 탄압이 시작됐다.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과 종교 군벌 군사 지도자들이 체포되었고, 정부에 호의적이던 [[찐민테]]나 응우옌타인프엉(Nguyễn Thành Phương)의 부하들조차도 당초 응오딘지엠이 약속했던 것과 달리 베트남 정규군에 전혀 편입되지 못했다. 호아하오교 지역 주민들에게 위대한 영웅으로 칭송받던 [[레꽝빈]]이 정부에게 항복했음에도 항복을 거부당하고 [[단두대]]로 처형당했다. 이렇게 민중들의 지지를 받던 인사를 체포한 사람들이 하필이면 구 [[베트남국]]의 친불 기득권 세력이라는 점도 문제였고, 사실상 응오딘지엠은 이 때부터 민중들을 상대로 한 명분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https://gall.dcinside.com/m/war/1640506]]] 종교파만 탄압당한 것이 아니다. 응오딘지엠은 반공선언운동을 벌이는 한편 반공 재교육 캠프를 만들어 1만 5천~2만명을 수감시켰고 1957년에만 7~8만의 정치범을 투옥시켰다. 1956년 1월 '질서와 안보가 충분히 회복될 때까지 국가 방위와 공공질서에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누구라도 가택 연금하거나 수감할 수 있다'는 법령 6호를 발표했고 1959년 10/59법을 발표, '국가안보를 파괴 혹은 침해하려는 목적을 지닌 범죄를 저지르거나 혹은 그에 대한 기도는 사형에 처해진다'고 발표했다. 이 법은 피고인 변론도 주지 않는 악법이었다. 이 법은 1962년 11/62법, 즉 최전선군사법으로 강화되었고 가족 친목회까지 탄압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 치하보다도 덜 자유스럽다는 평가까지 나왔고 북베트남은 응오딘지엠이 16만명을 죽이거나 부상입히고 24만명을 투옥시켰다고 주장했다. 한편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이전부터 명백했다. 미국은 루스벨트 정권 시절에는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를 제거하려 했지만 트루먼 정권이 들어선 이후 반식민주의보다는 반공에 집중하여 [[유럽]]의 반공질서 구축을 위해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개입을 묵인했다. 트루먼 정권이 일찍이 1950년 2월 1일 바오 다이 정부를 승인함으로 인도차이나에 본격적으로 개입했고 [[국공내전]]과 [[6.25 전쟁]]이 각각 [[국부천대]]와 시원치 않은 휴전으로 마무리됨에 따라 [[인도차이나]]의 정치적 중요성이 높아졌다. 미국은 인도차이나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우려했고 적극 개입하기에 이르렀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미국이 퍼부은 돈만 30억 달러에 달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제네바 회의의 미국대표단에게 "예상치 못한 정전 혹은 현존하는 합법정부를 타도하는 기능을 가진 어떤 해법을 인정하거나 동의하지 말라."라고 지시하는 등 남베트남의 공산화를 막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1954년 이래 미국의 대월정책은 1. 남베트남의 안보 확보, 2. 남베트남의 경제발전, 3. 남베트남의 민주주의 증진이었다. 그리고 남베트남 지원의 명분을 약화시키는 제국주의를 연상케하는 바오 다이 정권 퇴출과 응오딘지엠 정권의 성립을 지원한 것이었다. 1954년 9월 8일 동남아시아조약기구가 정식으로 출범했고, 아이젠하워는 10월 23일 "강하며 성장발전하고 전복시도나 침략을 방어할 수 있는 국가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이때부터 응오딘지엠 정권에 대해 이념 기초, 헌법 구상, 군사, 경찰, 정보, 행정, 문화, 교육, 경제 전반에 대한 인적, 물적 지원이 시작되었고 1954~1955년에만 3억 2천만 달러에 달하는 지원이 있었다. 하지만 앞서 적은 것처럼, 1955년까지 응오딘지엠에 대한 미국의 지지는 그렇게 확고한 것이 아니었다. 응오딘지엠에 대한 회의를 막고 지원한 것은 CIA와 미국의 응오딘지엠 지지자들이었는데 대표적으로 랜스데일과 맨스필드 등이었다. 렌스데일은 응우옌반힌 제거를 원조했고 맨스필드는 바오다이 퇴출을 도왔다. 1955~1956년까지의 미국의 원조는 남베트남 반공정권의 유지와 재생산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는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응오딘지엠의 반민주성과 이것이 결부되면서 민주주의 증진은 등한시되고 미국의 베트남 지원은 남베트남의 현대적 경찰국가화에 큰 도움을 주었다. 1961년 말, 미국인 고문수는 700명에서 1962년 중반 3,400명으로 증가했고 미국의 지원이 생존에 필수적이었던 응오딘지엠 정권이 '미국의 돈과 비전에' 종속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에 서방 언론에서 남베트남은 독립성을 의문시하는 비판적 보도들이 나오게 되었다. 확실히 미국은 남베트남에 대해 지나치게 고압적인 정책을 유지하여 정권 내부의 반발도 샀다. 응오딘뉴는 "미국 대사는 편견을 가지고 우리에게 언제나 반대한다."라고 했으며 웅오딘지엠도 미국 고문들이 베트남을 식민지로 여기는 듯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응오딘지엠 정권 역시 미국의 괴뢰국이라는 주장을 북베트남과 반미 측에서 오랫동안 정설인양 유포했지만 응오딘지엠 - 미국 관계는 어디까지나 주권국가간 관계로 평가되며 응오딘지엠 정권은 괴뢰국이 아니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하지만 사실상 괴뢰국과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당장 응오딘지엠 정권의 출범이나 종말도 모두 미국이 관여했다. 응오딘지엠의 몰락은 이러한 사실을 간과한체 자신의 힘으로 미국의 간섭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그리고 응오딘지엠 정권붕괴후의 남베트남 정권은 응오딘지엠의 사례를 확실히 보았기 때문에 미국에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었고 결국 미국이 남베트남을 버리자 패망할 수 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지나친 입김을 경계하여 이를 제거하기 위해 한가지 수단을 도입했는데 그것이 바로 '''가족 정치'''였다. 응오딘뉴는 내무부장 겸 남베트남의 여당인 근로당 지도자였고 제수인 '마담 누' [[쩐레쑤언]]은 국회의원 겸 베트남여성운동 수장을, 오정유의 처가에 외교부장, 교육부장을 비롯한 부장직 3개에 주요국 대사, 파기원 주석 등의 요직이 돌아갔으며, 응오딘깐이 공식 직위도 없이 중부 지방을 통치하는 등[* 이 때문에 대개 중부지역 사령관 정도로 표현된다.] 베트남은 응오딘지엠의 개인 왕국처럼 변해갔다. 게다가 응오딘지엠의 정권은 남부에 있으면서 정작 남부사람들을 배척하고, 중부인과 북부인을 중심으로 정권을 꾸렸는데 베트남에 중부인이 500만, 남부인이 900만에 달한 반면 상위 행정관료 186명 중 남부인은 67명에 불과했다. 소외된 남부인들은 정권에 대해 반감을 품었다. 게다가 전국의 7%에 불과한 가톨릭 교도들이 국회의 22~27%를 장악했다는 보고도 있었다. 이로 인해 응오딘지엠 정권이 민사 정책을 펼쳐도 민중들은 다른 발음을 구사하고 상이한 종교를 믿는 이방인이었던 피난민들로 구성된 정부의 억압적인 통치에 분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